[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2장 / 포르투갈의 바탈랴 수도원(18)
조금은 지친 것 같은 모습으로 동굴로 들어서던 천동은 깨어서 맞이하는 국화를 보고 의아해했다. 내심 지금쯤은 그녀가 어디론가 떠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에게 그녀는 그저 혹과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대놓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천동은 말없이 빤히 국화를 쳐다보았다. 그의 그런 행동에 민망하여 얼굴이 다소 상기되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늦었네? 잠도 안 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
“안 떠나고 남아 있었네요?”
말을 해 놓고 천동은 아차 싶었다. 이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저도 모르게 불쑥 엉뚱한 말이 뛰어나온 것이다.
“나? 갈 데가 없어.”
그의 실언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그녀에게 천동은 얼른 말을 바꿨다.
“잘 하셨어요.”
“이곳 울산만 해도 서생포 왜성에 왜병들이 많다는 거, 동생도 알잖아. 시댁도 죽거나 피란가고 서방님은 전란 전에 이미 돌아가셨어. 아이도 없는 며느리라서 시동생과 시어머니는 떠난다는 말도 없이 어디론가 가셨어. 아마도 피란을 가셨거나 어쩌면 왜군들에게 잘못됐을 수도 있을 거야. 살던 집은 불타고 없어. 나는 이미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야. 전란 중에 보호자도 없는 아녀자가 어떻게 살겠어? 그렇지만 동생이 나가라고 하면 가야겠지.”
“저도 누님이 남아있어서 좋아요.”
“동생의 그 말 진심이 아닌 거 알아. 나하고 같이 있으면 동생이 위험해 지겠지. 그래도 동생이 쫓아내지 않으면 여기에 있고 싶어.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정신 나간 년처럼 보이지?”
“저는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낯선 여자와 이 동굴집에서 생활한다는 게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그래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렇게 불편하면 내가 나갈게.”
국화는 그렇게 말하고는 동굴을 나가려고 발을 움직였다.
“저, 가지 마세요. 불편해도 나보다 누님이 더 불편할 것 같은데, 이런 곳이라도 괜찮으면 생각이 바뀔 때까지라도 그냥 여기서 지내세요.”
“고마워.”
“나는 피곤해서 잠 좀 잘게요.”
천동은 구석진 곳으로 가서 누더기 같은 이불을 덮고 잠을 청했다. 전투로 인한 긴장이 풀린 탓에 그는 금방 잠이 들었다. 그러나 국화는 천동이 올 때까지 밤새 자지 않고 기다렸건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기다리는 동안 정말 오만가지 상상을 했다. 그가 동굴을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겠지만, 이 땅 어디에도 그녀가 갈 곳은 없었다.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쪽 지방은 물론이거니와 북쪽으로 가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난리 중에 반가의 아녀자라고 해서 사람들이 그녀를 존중하고 보호해줄 리 만무하다. 잘하면 끼니는 거르지 않는 집의 첩이나 일꾼으로 목숨을 연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