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개교 100주년, 대한민국 산업화 역사와 함께한 대현초등학교

2025-07-29     경상일보

“정유공장에 학교터를 내어주고 어린아이들이 논둑길을 따라 손수 책걸상을 옮겼지.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도착한 곳에 새 학교는 없고 군용천막만 있었어. 천막교실이었지. 운동장은커녕 울타리도 없었어. 남학생들은 삽을 들고 등교하여 학교울타리를 만들고, 여학생들은 집 세면대야를 들고 와 운동장 돌을 주어 담아 날라야 했어.” 나이 70대를 막 넘어선 대현초 동문들의 학교생활 추억담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대현초등학교는 1962년 정부의 울산공업센터 지정과 함께 시작된 정유공장 건설계획에 따라 당시 울산시 남구 고사동에서 선암동으로 이주를 해야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7월8일 개교한 이후 37년 만에 배움의 터를 잃은 것이다. 그 자리가 지금의 SK이노베이션 울산CLX다.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졸지에 학교 교실을 잃고 거리에 나 앉은 셈이었다.

칠판을 들고 나와 나무에 걸어놓고 수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학교를 지어놓고 이전을 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먼저 옮겨놓고 학교를 지었던 것이니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했다. 화장실 조차 없었다. 1964년 2월말에 본관 건물이 신축되어 입주하였으니 어린 학생들은 2년 넘게 그렇게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학업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러다 교실이 완공되었지만 문제는 그치지 않았다. “교실은 생겼는데 교실이 미어터졌어. 학생들이 급속도로 늘어났던 거지. 한개반의 학생이 100명 가까이 되었어. 교실이 꽉 차서 교탁 옆으로도 학생들이 앉아야 했어.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냥 서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니까.” 산업단지 조성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의 정부 부처 공무원들과 기업인들이 속속 대현초등학교 주변지역으로 이사를 오고 전국방방 곳곳에서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때문이었다. 건설 붐에 도로 공사가 이어진데다 안전의식은 부족해서 희생되는 아이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대현초등학교는 한 번 더 이주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번엔 공해 때문이었다. 1968년 9월4일 한 중앙일간지가 ‘울산공업센터 이웃 학교 꼬마, 수업 중에 쓰러지기도’라는 제목으로 “울산정유공장 등과 불과 100m 이내에 있는 대현국민학교는 42학급 2766명의 아동들이 수업하고 있는데, 학교측으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100여 명의 아동들이 수업 중 두통, 눈물, 구토 등을 일으켰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당시의 대현초 학생들은 인근 석유화학공단의 공해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학교 인근 기업체로부터 배출되었던 폐수가 따뜻하다고 수영을 하고 놀았던 아이들이 많았고, 지금도 이를 추억담으로 나누고 있으니….

결국 대현초등학교는 정부의 공업단지 조성 정책에 따라 SK의 전신 대한석유공사에 자리를 내어준데 이어 10년만인 1973년 그 공단에서 발생된 공해로 인해 다시 야음동으로 이주를 하여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교생이 온전하게 대현초로 옮겨가지 못하고 일부는 선암동에 남아 선암초로 별도 개교하는 이력을 갖게 되기도 했다.

이렇게 대현초등학교의 100년 역사는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그 주체인 세계 굴지 기업들의 성장사 그리고 산업역군들의 애환과 이주사를 대변하고 있다.

학생들은 항상 넘쳐나 개교 이래 지금까지 무려 9개 학교가 분리되어 나가는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전국적으로 학생 수 부족으로 초등학교 폐교가 속출하고 있으나 대현초는 현재도 재학생이 800명을 넘어 교실이 부족할 정도로 100년에 걸쳐 한 번도 교세가 꺾여본 일 없이 날로 번창하고 있다. 대현초등학교 개교 100년, 산업화의 희생 속에서도 100년의 연륜을 쌓으며 2만2000명의 인재를 길러 온 전무후무한 기념비적 발자취라 할 것이다. 폭염을 피해 10월25일 기념행사를 한다. 이제 다시 미래 천년의 문을 열고 힘차게 나아갈 때다.

정연국 대현초 총동창회장 전 청와대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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