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생각]무분별한 환원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
물질이 인체에 작용해 병을 고치거나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을 우리는 흔히 ‘약’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약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환원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과학의 본래 정신을 흐릴 수 있다. 한 수도권 사립대 화학과 교수가 쓴 책에서, ‘약(drug)이 되려면 하나의 명확한 화학식이 있어야 하고, 작동 원리가 확실히 밝혀져야 하며, 치료 효과에 대한 증거가 분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런 오류의 대표적인 예다. 얼핏 합리적으로 들리지만, 실제 의약품의 개발과 허가, 임상 적용의 복잡성을 무시한 매우 편협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하나의 명확한 화학식’이 약의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 FDA나 한국 식약처의 약물 허가 시스템에서도 단일 화합물이 아닌 복합 성분의 약제가 허가되는 경우는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로, 항암제나 항생제 중에는 천연물 유래 성분이 혼합된 상태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또한 한의학에서 유래한 한약재도 과학적 근거를 갖추면 충분히 의약품으로 인정받는다. 실제로 의약품 데이터베이스를 보면 ‘정확한 단일 화학식’이 아닌 ‘복합 추출물’로서 성분이 등록된 약도 허다하다. 더불어 백신의 경우도 하나의 화학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단백질 조각이나 비활성화된 바이러스 등이 사용되며, 그 작동 메커니즘 역시 수십 년의 연구에도 완벽히 해명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작동 원리가 명확해야 한다’는 주장도 과학의 실천적 현실을 모르는 발언이다. 실제로 의약품의 작용 기전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반복적인 임상시험과 통계적 유의성에 근거해 승인되는 약물은 많다. 타이레놀(아세트아미노펜)은 20세기 중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사용돼 왔지만, 뇌에서 어떤 방식으로 통증을 억제하는지는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처럼 과학은 언제나 ‘완전한 설명’보다 ‘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모 화학과 교수의 주장은 결국 ‘환원주의’의 전형이다. 인간의 몸과 질병, 그리고 약물의 작용을 단일 분자 수준으로 축소해서 이해하고자 하는 관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명현상은 복잡계이다. 같은 약을 써도 사람마다 반응이 다르고, 어떤 성분이 단독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상호작용을 통해 효능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다. 이때 다양한 분자들의 상호작용, 세포 수준의 반응, 개인의 유전적 배경, 심지어는 장내 미생물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를 단순한 ‘하나의 화학식’으로 환원하려는 시도는 생명의 복잡성과 의학의 현실을 도외시한 처사이다.
약이란 단지 분자 하나가 아니라, 인간과 생명,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복합적 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도구이다. 그런 약을 단일 화학식으로 정의하려는 것은, 마치 인간을 DNA로만 설명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실을 축소하는 위험한 시도이다. 과학자는 모르는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며, 복잡함을 단순화하려는 충동을 경계해야 한다.
성주원 경희솔한의원 원장 한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