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문인화 산책]힘이 아닌 덕으로…惡을 극복하는 관용의 미소
2025-08-04 차형석 기자
울산 남구 황성동에서 150m 떨어진 외황강의 외딴섬으로 처용설화의 배경이 되는 처용암(處容巖)이 있다. 울산의 역사와 함께하는 ‘처용’(處容)에 관한 전설은 시대에 따라 혹은 연구자의 해석에 따라 변화무쌍한 신화적 존재이자 지금까지 울산의 문화적·예술적 실체로 자리하고 있다. 처용 담론의 전승사적인 측면에서 처용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축적되고 있다. 신라 ‘처용가’는 향가적 장르의 틀을 뛰어넘어 고려가요·악장·향악정재·연희무 등의 수많은 장르적 확산과 문화적 변용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우리 문화 예술사에 대중적 생명력을 던져주고 있다.
역신(疫神)이 범한 과오에 대해 처용이 노여워하지 않고 오히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자 이 모습을 본 역신이 감격해 뉘우치고 꿇어앉아 “이후 공(公, 처용)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라고 한 대목을 보면, 처용은 평범한 인간의 행태를 뛰어넘는 높은 수준의 풍격을 지닌 인격체로 나타난다. 신라 헌강왕 때 비롯된 ‘벽사진경 상징으로의 처용 형상’에 대한 일반의 이해와 묘사는 이후 고려를 거처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고, 그 결과 조선 성종 24년(1493)에 편찬한 국악 이론서인‘악학궤범’(樂學軌範)에 처용 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향가 ‘처용가’를 보면 처용은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노래와 춤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역신은 이에 감복해 처용의 집에는 다시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로부터 처용의 얼굴을 그린 부적이 액운을 막는 민속 신앙으로 발전했다. 이런 처용의 태도는 인간적 고뇌와 체념, 그리고 초월적 관용을 상징한다. 역신이 감복해 물러나는 결말은, 악을 힘이 아닌 덕과 관용으로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벽사진경(僻邪進慶,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음)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후 처용탈, 처용무 등 다양한 문화와 예술적 소재로 확장되고 있으며 울산의 살아있는 신화로 자리하고 있다.
‘처용탈’에는 긴 역사의 흐름에서 만들어낸 상징들이 축적돼 나타나고 있다.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사악한 것을 좇는다는 의미의 ‘복숭아 나뭇가지’, 나무로 깎은 일곱 개의 복숭아를 달았다. 복숭아 일곱 개를 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서왕모(西王母)는 곤륜산에 사는 신선으로 어느날 한무제를 만났다. 서왕모는 3000년에 한 번씩 열리는 천도복숭아 일곱개를 선물로 가져가 나눠 먹었다. 여기서 복숭아를 신선이 먹는 불로장생의 과일로 상징하게 됐다고 한다.
작가는 울산 문화와 예술이 집적된 처용의 담론을 처용탈의 상징과 ‘처용가’의 내용을 압축해 그림으로 옮겨내고 있다. 작품 <처용가>를 보면 좌측 처용탈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우측에는 수묵담채를 사용해 역신과 처용의 처와의 미묘한 관계를 사의(寫意)적으로 표현해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특히 좌측 처용가의 내용 일부를 쓴 화제는 작품 전체의 공간감 즉 여백을 통해 조형적 어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같이 작가는 단순히 처용의 역사적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처용가’를 통해 지금의 이야기로 바꾸어 처용의 ‘관용의 미소’를 드러내고 있다. 이같이 처용의 이야기는 온고지신의 관점에서 새로움을 찾아가는 중요한 담론이다.
울산하면 처용문화제를 빼놓을 수 없다. 처용문화제는 1967년 울산공업축제로 시작해 1995년에 처용문화제로 바뀐 뒤 30여년간 울산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해오다 2023년부터 다시 울산공업축제로 명칭이 바뀌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통문화의 가치를 보존하고 재생산하려면 콘텐츠를 개발하고 다양한 해석을 포용하는 열린 시각이 필요한데, 울산의 처용문화제가 사라진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향가 ‘처용가’는 원작 자체에 얽매이지 않고 시대를 두고 춤·음악·굿거리·오페라·연극·미술 등으로 영역이 확장되어 우리 문화와 함께 소통하고 있으며 차이 속에서도 일관되게 지향하고 있는 ‘관용’이라는 화두를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다. 지속적으로 울산의 살아있는 문화, 시대의 문화, 전통의 문화를 엮어내는 문화적 상징으로 처용의 문화를 재생산해 처용 콘텐츠를 체계적으로 집적해 내야 할 것이다.
‘처용가’는 1300여년 동안의 문화와 예술의 고유성·축적성·통합성을 담아내고 있으며, 인간의 감성과 휴머니즘·제의적 요소·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모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적나라한 현실적 상상력·예술적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다양하게 내재하고 있다. 이같이 처용의 문화는 한 시대의 문화도 아닌 기록으로 소실된 전통문화도 아닌 대중의 상상(想像)의 욕망을 자극하는 이 시대의 살아있는 문화와 예술로서 전통과 현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
글=김찬호 미술평론가·그림=이재영 문인화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