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디지털 제품 여권의 현실화 : 산업현장 적용과 대응 전략

2025-08-07     경상일보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이 개념적 논의 단계를 넘어 실제 산업 현장에서 구현되기 시작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전기차 배터리, 가전제품, 섬유 등 다양한 산업에서 시범 사업이 진행 중이며, 제품의 전 생애주기 데이터를 투명하게 관리함으로써 순환경제 전환을 가속화하고 있다. 특히 2026년부터 EU 내에서 판매되는 모든 전기차 배터리에 디지털 제품 여권이 의무화될 예정이어서, 관련 기업들은 발 빠른 대응이 요구된다.

실제로 다수의 글로벌 배터리 및 완성차 제조사들은 디지털 제품 여권 시스템을 개발하고, 제품 정보의 표준화를 위한 GS1 코드 체계를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주요 완성차 업체는 배터리의 생산 이력, 원재료 출처, 탄소 배출량, 재사용 가능성 등을 포함하는 정보를 블록체인 기반 시스템에 등록하고, 이를 QR 코드 형태로 소비자와 공유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은 제품 투명성을 높일 뿐 아니라, 탄소중립 경영의 핵심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 역시 디지털 제품 여권 도입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24년부터 전기차 배터리 및 이차전지 산업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제품 이력관리 시범사업’을 추진 중이며, 배터리 제조사들은 GS1 코드와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한 제품 추적 시스템 개발에 착수했다. 일부 기업은 생산단계에서부터 재제조와 재활용 가능성을 고려한 데이터 구조를 설계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향후 EU 진출 시 규제 대응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디지털 제품 여권의 활용 가능성은 특정 산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기차 및 배터리 산업에서는 제품 수명, 탄소 배출량, 원재료의 윤리적 조달 여부까지 디지털 여권을 통해 투명하게 관리하는 체계가 구축되고 있으며, 유럽에서는 차량 등록 시 배터리 여권 제출이 요구될 만큼 제도화가 진전되고 있다. 한국의 배터리 기업들 또한 이에 발맞춰 데이터 수집과 관리 체계를 정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가전제품, 섬유·패션, 의약품, 화장품 등 여러 산업에서도 디지털 제품 여권의 도입 가능성이 활발히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제품 여권의 산업 현장 적용은 단순한 기술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실질적 구현을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우선, 데이터 생성과 수집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동일한 제품군이라도 제조사마다 기록하는 정보 항목과 형식이 다르면 시스템 간 연동이 어려운데, 이를 해결하려면 산업 및 국가 간 합의된 데이터 표준 체계 마련이 시급하다. 또한, 디지털 제품 여권은 단일 기업이 독자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원자재 공급자부터 완성품 제조사, 유통업체, 재활용업체까지 전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하며, 이를 위한 정보 공유와 공동 거버넌스 모델 설계가 필수적이다. 아울러 초기 시스템 구축 비용, 인력 확보, 교육훈련 등은 중소·중견기업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정부 차원의 재정적·제도적 지원 없이 디지털 제품 여권의 확산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디지털 제품 여권은 단순한 제품 관리 시스템을 넘어 탄소중립과 ESG 경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EU는 향후 제품의 환경 성과를 점수화한 ‘에코스코어(Eco Score)’를 도입하고, 이를 기준으로 시장 접근 권한을 제한하거나 세제 혜택을 차등 적용할 계획이다. 이는 기업의 수출 경쟁력과 직결되는 사안으로, 한국 기업들 역시 선제적 대응이 절실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은 디지털 제품 여권을 산업 전반의 경쟁력 강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자동차, 배터리, 전자제품 산업은 물론, 섬유, 식품, 의약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도 디지털 제품 여권의 개념을 확장할 수 있다. 산업별 특성에 맞춘 맞춤형 데이터 모델을 개발하고, 국가기술표준을 고려한 통합적인 추진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결국 디지털 제품 여권은 ‘디지털 전환’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두 흐름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이를 단순한 규제가 아닌, 제품의 전 생애주기 경쟁력을 높이는 디지털 혁신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기술, 제도, 협력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한국 산업이 디지털 제품 여권을 통해 글로벌 무대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를 기대한다.

권상진 연세대학교 산업공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