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민의 불역유행(不易流行)(26)]‘금요병’ 조직문화를 만들자

2025-08-08     경상일보

1990년대 외교부에서 과장은 하늘이었고 국장은 감히 쳐다보지 못할 존재였다. 장·차관 앞에서 직접 보고할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어찌어찌 기회가 생기면 입술이 얼음처럼 굳어 버리곤 했다. 어려서부터 한 살이라도 더 많은 분에겐 형님이라 존칭했고, 뭐든 배우려고 했다. 그렇기에 상사의 말은 무엇이든 견뎌야 했고, 과도한 일도 사명이었고 그 과정도 배움이라며 스스로 달랬다. 상사에게 10%의 장점이 있다면 90%의 단점을 덮어줬다.

그래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부류의 선배들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부부싸움의 뒤끝인 양 후배 직원들에게 화풀이를 해대던 과장, 공관 행정직원을 하인 다루듯 심통을 부리는 대사, 재외국민들에게 과도한 특급대우를 기대하는 공관장, 업무 능력은 없으면서 허세에 가득 찬 욕쟁이 상사, 뛰어난 부하들을 시기하고 공을 가로채려 하는 얌체 선배 등등 다양했다.

한번은 같이 근무했던 어떤 상사에 대해 해외 공관장으로 다시 보내도 좋을지를 묻는 다면평가 요청을 받을 일이 있다. 나와는 악연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다를 수 있겠다 싶어 한참을 고민했지만, 소신대로 ‘否(부)’라고 적었던 기억이 난다. 최종결과를 보니 나만 그렇게 본 건 아니었다. 결국 그 사람은 더 이상 공관장을 하지 못했고 정년을 채우지 못한 채 외교부를 떠났다.

리더십은 조직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짓기에 매우 중요하다. 외교부도 다르지 않다. 좋은 리더가 되려면 덕장이든, 용장이든 카리스마가 있어야 했고, 아는 것도 많아야 했다. 특히 해외에서는 유력한 정책 결정자들과의 돈독한 네트워킹이 필수이다.

“역시 우리 상사는 뭔가 다르다” “저 선배는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사람들과도 잘 지내는구나”하는 생각에 존경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생긴다. 겉과 속이 다르고 뒤가 구리며 덕이 없는 사람들의 주변은 쓸쓸한 법이다. 후배들을 품어주는 일도 중요하다. 간혹 막 입사한 후배들에게 높은 업무 퍼포먼스를 기대하는 선배들도 있는데 지나친 일이다. 후배들이 그들만큼 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10년 근무한 사람과 1년 일한 사람이 똑같기를 기대한다면 과욕 아니겠는가.

후배들을 평가하기 전에 나의 지난날은 어떠했는지를 곱씹어 보곤 했다. 나의 1년 차, 10년 차, 20년차 때 모습을 비교해서 나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점이 있다면 칭찬해 주고 주변에 자랑도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사람마다 가진 능력도, 발전 속도도 다르기에 웬만한 실수는 넘어가줘야 한다.

물론 성실하지 않은 후배는 따끔하게 가르쳐야 하고, 배울 자세가 전혀 돼 있지 않다면 가급적 빨리 헤어질 방안을 찾아야 한다. 권위로 해결하거나 감화로 고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상황이 악화되면 팀을 분열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무실에서 그곳 상사와 호흡이 맞을 수도 있겠고.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인격상 문제가 있거나 기대치를 훨씬 밑도는 실력에도 호기만 가득한 후배직원을 만나지 않았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팀원들이 즐겁게 일하고 단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과장시절부터 줄곧 이렇게 해 보리라 각오한 것이 있다. 월요일 아침 회사에 가기 싫은 ‘월요병’이 있듯, 금요일 오후에 사무실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금요병’ 직장문화를 만들어 보자는 거였다.

지난해 정년 퇴임을 앞두고 가진 회식 자리에서 몇몇 외교부 후배들의 “매주 월요일 아침이 밝아오기만 기다렸다”는 너스레에 잠시 눈가가 촉촉해졌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조직과 더불어 살도록 요구받고 있다. 누군가로부터 엉덩이를 철썩 맞고 ‘응애’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부터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로서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둘러싸이게 되고, 독립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장이라는 굴레에 갇혀 살게 된다. 물론 자연 깊은 곳으로 들어가 바다와 산을 벗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자연인들이 있다.

인생 버킷리스트 중 하나일 수 있겠지만 자연인의 삶이란 극히 예외적인 것이고 외로운 시간을 즐겨야만 하는 사유들이 있을 것이다. 피를 나눈 가족들과도 함께 있어 마냥 즐겁고 행복할 수 없을 터인데, 직장 내 분위기가 갑질로 심상치 않다면 월요병이 도지고 결국 회사까지 그만두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업무 능률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고 직장에 미치는 피해도 클 것이다.

최근 언론에서 모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과거 갑질 상사들의 생각하기조차 싫은 얼굴들과 그들의 행동거지들이 떠올랐다. 육두문자의 욕지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쏘아대면서 “당신 자리를 치워 버리겠다”는 위협까지 스스럼없이 내뱉던 어느 고위 공직자의 믿지 못할 작태가 치를 떨게 한다.

35년 외교관 생활을 은퇴한 지금도 이 상태라면 트라우마가 깊은 듯 싶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실정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직장 내 갑질 문화는 완전히 종식돼야 한다. 을질도 문제다. 정상적인 수준의 업무강도와 업무량을 자신의 역량과 의지 부족으로 소화하지 못했음에도 그 책임이 상사에 있는 양 불평불만을 여기저기 하고 다니는 사례가 예전보다 많다고 듣고 있다.

‘웰빙’과 ‘워라밸’만 주장하며 당연한 업무부담조차 기피하는 경우도 많다 한다. 이런 후배들로부터 나쁜 다면평가를 받을까 두려워, 좋은 게 좋다 식으로 눈을 감아주는 선배들 또한 많다고 한다. 잘못을 해도 지적하지 못하고 책임을 뒤집어 쓰는 경우도 생기고 주말에 홀로 나와 보고서 초안을 작성하고 있는 과장, 국장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십수년 전 어느 일요일, 해외출장 준비로 사무실에 들렀는데, 웬걸! 혼자만이 아니었다. 함께 최선을 다해준 그 후배들이 많이 그립다.

박철민 울산대 교수 전 울산시 국제관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