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 문화전(文畵展)]영생의 갈망, 불변은 없다

2025-08-11     차형석 기자

피라미드의 장관은 영생을 향한 인간의 염원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려준다. 세계 곳곳에 널린 장엄한 종교 건축물들은 죽음에 대한 인간 특유의 고통과 극복 의지를 증언한다. 사원과 성당, 교회, 모스크를 찾아 두 손 모으는 사람들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대부분 ‘불행을 줄이고 행복을 늘리려는 세속적 염원’이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언제나 ‘한시적인 삶에 대한 불안을 떨쳐낼 영생의 염원’이 자리 잡고 있다. 종교 순교자든 전쟁 순교자든, 그들의 용맹에서는 ‘영생의 확신’이 어려있곤 한다. 사실 모든 종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존립의 근원적 기반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현상은 예외 없이 변화무쌍하다. 좋은 느낌을 발생시키던 조건들은 어느새 변하여 사라지고, 불쾌감을 주는 조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우위와 만족을 발생시켰던 조건들은 열등과 불만을 겪게 하는 조건들로 바뀌곤 한다. 좋은 일도 변화로 인해 생겨난다. 고통과 불행의 조건들이 변하여 사라지고 안락과 행복을 누리게 하는 조건들이 등장한다. 질병의 고통을 건강의 안락으로 바꾸는 것도 심신이 변화하기에 가능한 일이고, 빈천에서 벗어나 부귀를 누리게 되는 것도 모든 것이 변화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행·불행 경험은 모두 변화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과 시선은 상실과 훼손 등 나쁜 일에 편향된다. 생존하기 위해 끝없이 나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던 진화의 여정도 그 한 이유일 것이다.

변화를 보는 시선이 부정 편향성을 보이는 근원적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언어능력으로 인해 발현된 장기 기억 능력은 현실 이해의 토대가 되는 동시에, 미래 예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장기 기억과 현재에 대한 이해, 미래에 대한 예상은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이 삼세(三世)의 경험은 ‘변화로 인한 상실과 박탈’에 기울어져 있다. 변화·관계·차이를 불변·독자·동일로 치환해 버리는 언어의 속성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언어 속성에 지배된 인간은 ‘불변·동일에 대한 기대’가 변화로 인해 좌절되는 경험을 반복한다. 언어의 속성으로 인해 인간은 변화를 불안으로 경험하게끔 조건 지워져 있는 존재이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상실마저 현재로 당겨와서 불안과 고통의 족쇄에 갇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변화로 인한 상실’을 현재로 당겨온 것이다. 사실 누구도 자기의 죽음을 직접 경험하거나 기억하지는 못한다. 숨 멎는 순간까지 오직 삶을 경험할 뿐이다. 인간이 겪는 죽음의 공포는 죽음 체험에 대한 것이 아니다. ‘변화로 인한 상실’을 우려하는 관념적 두려움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원하는 대로 있어 주지 않고 변하는 것’이며, 또 ‘원하는 대로 차지할 수 없고 마음대로 부릴 수 없는 것’이다. ‘변화로 인한 상실’과 ‘소유·지배 욕망의 좌절’은 불변과 주재(主宰)를 꿈꾸는 인간 삶의 근원적 균열이다. 이 문제에 대응하는 통념적 방식은 ‘소유의 무한 확대’와 ‘지배력의 무한 강화’다. 소유량과 지배력의 무한 확대를 추구하는 인간 특유의 충동은 ‘소유·지배 욕망의 좌절에 대한 반발’이다. 붓다가 지적하는 ‘탐욕과 분노 및 무지’는 이 사태와 관련된 심리적 현상이다.

소유욕과 지배력의 무한 증식을 해법으로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이고도 완전한 해법을 구한다. 어떤 해법이 있을까? 경험 세계의 모든 현상은, 예외 없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원하는 대로 있어 주지 않고 변하는 것’이며 ‘원하는 대로 차지하거나 부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삶의 고통에 예민한 이들에게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문제 거리다. 간절히 해결하고 싶지만, 마땅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때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가장 선호하는 출구는 ‘변화’를 무력하게 하는 ‘불변’의 확보다. ‘불변·동일의 상태’를 확보할 수 있다면, 변화로 인한 모든 불안과 고통이 일거에 해결된다. 그리하여 불변·동일에 대한 갈망은, 그러한 속성을 지닌 존재가 실재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궁극 실재’의 등장이다. ‘궁극’이라는 말은 변화·관계·차이의 현상 이면이나 너머를, ‘실재’라는 말은 ‘불변·동일·순수·독자·절대의 속성을 지닌 참된 존재나 상태’를 의미한다. 궁극 실재란, ‘변화·관계·차이의 현상 이면이나 너머에 실재하는 불변·동일·순수·독자·절대의 속성을 지닌 참된 존재나 상태’를 지칭하는 용어다. 이 궁극 실재를 철학이나 인문학에서는 ‘실체’ ‘본질’ ‘본체’ ‘이데아’ 등으로 부르고, 신앙 종교에서는 ‘절대·유일·전능의 인격신’이라 부르며, 수행 종교에서는 ‘아트만·브라흐만’ ‘참 자아’(眞我) ‘본성’ ‘순수 영혼’ 등으로 부르곤 한다.

궁극 실재에 대한 갈망이나 주장이 맞닥뜨리는 치명적 반론이 있다. <현상 이전이나 너머에 존재할 것이라 설정하는 궁극 실재는 요청일 뿐이지 경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비판이 그것이다. 궁극 실재에 관한 주장은 변화·관계·차이의 세계에서 겪는 혼란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채택된 ‘요청된 상상’일 뿐, 경험 세계에서는 그 존재가 어떤 방법으로든 검증될 수 없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다. 사실 여태껏 그 누구도 이 궁극 실재를 경험적으로 증언한 경우는 없다. 경험 세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변화·관계·차이의 현상’일 뿐이다. 그래서 분석철학에서는 궁극 실재에 관한 주장을 ‘경험적 근거를 지닐 수가 없어 검증 불가능한 무의미한 명제’로 취급한다. 그러나 궁극 실재에 대한 인간의 염원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아직 보거나 경험하지 못했을 뿐 언젠가는 확인될 수 있을 것>이라며 물러서지 않는다.

궁극 실재의 존재를 선호하는 이들은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만약 불변·동일·순수·독자·절대의 실재가 없다면, 변화무쌍하고 인간에 의해 속속들이 오염된 세계의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지 않은가? 불변의 순수한 궁극 실재가, 현상 이면이나 너머에, 혹은 사후의 다른 세계에서라도 있어야 삶의 궁극 희망이 확보되지 않는가? 만일 그런 실재가 없다면, 삶은 고통과 허무의 황무지일 뿐이다. 만일 궁극 실재를 부정한다면, 어떤 대안을 희망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하는가에 따라 인문·철학·종교·문화의 행로가 달라진다.

현상세계의 변화와 인간의 오염 행위, 그에 따른 불안과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아예 ‘불변·동일·순수·독자·절대의 주소지’로 이주하려는 방식이 하나이고, ‘변화·관계·차이의 주소지’에 거주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다른 하나이다. 원효는 후자의 방식에서 ‘삶·죽음·변화와의 화해’를 성취하여 노래하고 춤춘다.

글=박태원 인제대 석좌교수(화쟁인문학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