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2장 / 포르투갈의 바탈랴 수도원(28)

2025-08-13     차형석 기자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니까 그냥 따라와. 맞기 전에.”

한 마디만 더 하면 정말로 맞을 거 같아서 천동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그를 따라갔다. 가야산의 용기산성과 지리산의 구성산성을 구경하려던 계획은 세평으로 인해서 틀어져 버렸다.

천동은 굳이 그를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의 말을 거역하기도 그래서 일단 부딪혀 보자는 심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걸어가는 도중에 무슨 말이든지 대화를 할 법도 한데 두 사람은 소 죽은 귀신처럼 말이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말없이 꼬박 사흘을 걸어서 세평이 가자고 한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곳에 설치된 군막에는 어림잡아도 만 명이 넘어 보이는 병사들이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 장군이 이끌고 있는 왜군의 주둔지였다.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서 마치 자기들 땅인 것처럼 수많은 병사를 주둔시키고 있는 적군의 진영을 들어가는 느낌은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울 만큼 묘했다. 천동은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주둔지 안쪽의 깊숙한 곳에는 붉은색 바탕의 천에 흰색으로 십자 모양의 문형이 있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깃발의 느낌은 상당히 강렬하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보통의 경우는 동물이나 글자를 쓴 깃발을 사용하는데, 이제까지 보았던 깃발과는 달리 열십자의 숫자문양을 한 대장기라서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런 군기는 처음 보지?”

“네.”

“그럴 것이다. 다들 저 깃발을 보면 무엇을 의미하는 문양인지 궁금해 하지. 조금 있으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궁금해도 기다려라.”

“네.”

붉은색 바탕이 주는 느낌은 강렬했다. 왜 붉은 색일까? 쳐다보면서 계속 천동은 그 생각을 했다. 보통 붉은색은 잡귀를 쫓아낸다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는데 저 깃발도 그런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흰색이 주는 의미는 또 무엇인가?

천동은 너무나 강렬한 고니시 군영의 깃발을 계속해서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세평을 따라서 영내로 깊숙이 들어갔다.

9년 전인 1585년, 포르투갈의 중심부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아름다운 포르투갈의 상징 바탈랴 수도원에 가스파르 코엘류를 비롯해 프로에스, 빠체코, 세르페데스, 고메스 신부가 비밀리에 모였다. 이들 5인은 초기 예수회의 5인회를 흉내 낸 그들만의 조직으로 주군인 세바스티앙의 복위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바스티앙이 모로코의 알카사르키비르 전투에서 패하여 사망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슬람과의 성전에서 십자군을 이끈 그들의 주군을 하느님이 결코 그대로 데려가시진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군인 세바스티앙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지금의 혼란스러운 포르투갈 조정의 권력자인 스페인국왕 펠리페 2세와 공작부인 카타리나의 눈을 피해서 오늘 이곳에서 모인 것이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