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김해자 ‘지그시’

2025-08-18     차형석 기자

소나기 몇 줄금 지나간 어스름 옥수수 몇 개 땄지요 흘러내리는 자주와 갈빛 섞인 수염, 아무렇게나 겹겹 두른 거친 옷들 한 겹 두 겹 벗기다 그만 그의 연한 병아리 빛 속 털 보고 만 것인데 무게조차도 없이 그저 지그시, 알알 감싸고 있는 한없이 보드라운 속내 만지고 만 것인데요, 진안 동향면 지나다 왜가리숲 아주 오랫동안 바라본 적 있어요 소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왜가리들, 꼼짝 않고 있는 새들은 모두 알을 품고 있었죠 폭우가 쏟아져도 한 자리에서 지그시, 입과 날개 거두고 지그시, 소중한 것 깊이 품어본 자들은 알죠 왜 한없이 엎드릴 수밖에 없는지, 왜 한사코 여리고 보드라워질 수밖에 없는지, 왜 하염없이 그를 감싸줄 수밖에 없는지, 사랑은 그런 것이다, 지그시 덮어주는 일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게 사랑이다, 혼자 중얼거리며 온갖 생각도 지우고 지그시, 중얼거림도 멈추고 그냥 지그시


사랑은 지그시 감싸주는 것

지그시 입술을 깨물다, 지그시 바라보다 처럼 드러나지 않게 가벼이 힘을 주거나 어떤 느낌을 가벼이 누르며 견딜 때 ‘지그시’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시는 ‘지그시’란 말의 의미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시이다.

시인은 옥수수의 거친 껍질과 수염 아래 보이는 연한 속살을 보고 보드라운 속내를 지그시 만졌다고 표현한다. 껍질과 수염이 없다면 옥수수알이 그처럼 연하고 달콤하고 쫀득한 맛이 날까? 지그시는 부드럽고 따뜻하게 감싸는 것이다.

시인은 또 소나무 가지에 앉은 왜가리가 지그시 알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왜가리는 폭우가 쏟아지는 데도 꼼짝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알을 품는다. 입과 날개를 거둔다는 것은 먹고 싶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날아가고 싶은 욕구를 꾹 참는다는 뜻이다. 지그시는 알을 품는 어미 새처럼 인내하고 품어주는 것이다.

지그시는 사랑의 자세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했다.

모든 것을 지그시로 바꿔 보자. 지그시 참으며 지그시 믿으며 지그시 바라며 지그시 견디는 것, 그게 사랑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