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성철 칼럼]직업, 경력, 꿈

2025-08-20     경상일보

약 20여년 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퇴근하는 버스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옆에 서 있던 젊은 동양인이 말을 걸어왔다. 재미교포 학생이었던 것 같다. 간단히 인사하고는 “너는 뭘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봐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 갑자기 “그 일이 너에게는 어떤 의미냐? 직업(Job)이냐, 경력(Career)이냐, 아니면 소명(Calling)이냐?” 라고 되물어왔다. 나는 주저없이 소명이라고 답했고, 이 대답은 오히려 이 학생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너는 소명이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고 다시 물어왔다. “잘 알고 있다”고 대답했더니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는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의사과학자 프로그램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인데, 최근에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내가 왜 의사가 돼야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인생의 가치를 고민하게 되면서 의사가 되는 꿈을 접으려고 한다고 했다. 나는 그 학생에게 “소명은 종교적인 직업을 가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 의사과학자가 되기 위해 얻은 소중한 기회를 포기하지말고 공부를 하면서 답을 찾으면 어떻겠냐”고 대답을 하고 버스를 내렸다.

내가 생각하는 직업, 경력, 소명의 차이는 같은 ‘일’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관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직업은 생계를 위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 경력은 자기개발과 자아실현의 개념, 마지막으로 소명은 종교적인 의미를 포함한 인생의 가치에 대한 철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여론조사업체 PEW 리서치센터가 2021년에 한국을 포함한 17개 선진국 성인 1만9000명을 대상으로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선택의 항목에는 가족, 물질적 풍요, 일, 사회, 신앙, 친구, 건강 등 다양한 요소들이 제시됐다.

결과에 따르면 17개국 중 14개 나라에서는 가족이 삶을 의미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았다. 가족이 1순위에 오르지 못한 나라는 한국, 스페인, 대만이었다. 그 중 한국은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았다. 이 조사 결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에 우리는 ‘식사 하셨습니까?’ 라는 인사를 흔히 주고 받았다. 후진국, 개발도상국 시절을 지나며 생계의 위협을 경험한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이 인사말이 쉽게 이해되지만, 선진국 시절을 살아가는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는 와 닿지 않는 인사이다.

우리는 한 세대 안에서 후진국에서 시작해서 선진국의 대열로 성장한 유일한 나라이다. 다른 선진국에 비해 물질적 풍요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아마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될래?”라는 질문보다는 “커서 뭐 먹고 살래?”라는 질문을 더 많이 듣고 자랐다.

우리 세대는 장래희망과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이 먹고사는 문제를 중심으로 가치가 형성된 것 같다. 지난 해 말에 발표된 장래 희망 직업순위를 보면서 서로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예전과는 다르게 다양한 직업군이 순위에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웠지만, 한 가지 직업의 순위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직업들 중에 의사의 순위는 초등학생에게는 2위, 중학생에게는 3위, 고등학생에게는 순위권 밖으로 밀려난 것을 봤다.

주위를 돌아보면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하고 어릴 때 아이들에게 의사의 꿈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라면서 성적이라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꿈을 접어야하는 가혹한 현실을 직면한다. 안타깝다. 아직 시작도 하기 전부터 꿈을 접는 좌절을 경험하게 하는 이런 사회와 교육은 이제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서 자기의 가치를 고민하고 인생의 보람을 물질적인 풍요 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세대들이 준비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의사라는 직업의 본질은 돈을 잘 번다는 것을 넘어 사람의 병을 고치고 살린다는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닌가?

배성철 UNIST 교학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