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내의 초록지문(21)]여름이 남긴 것

2025-09-10     경상일보

녹보수에 꽃이 피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반려식물이지만 꽃을 볼 거라 기대한 적은 없었다.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연둣빛 꽃송이가 짙푸른 이파리 아래에 숨어 있었다. 여름이 남긴 뜻밖의 선물이다.

식물에게 여름은 성장의 시간이지만 시련의 계절이기도 하다. 햇볕이 지나치면 광합성이 줄고 잎은 타들어 간다. 비가 모자라거나 너무 잦아도 문제가 된다. 가뭄은 뿌리를 메마르게 하고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는 작은 상처 하나도 치명적인 감염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식물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혹서기를 건넌다. 잎을 세워 햇살을 비껴내고, 은빛 잔털로 빛을 반사한다. 기공을 닫아 수분 증발을 줄이거나 뿌리를 깊이 내려 물을 찾는다. 키가 큰 나무는 햇볕을 가려 어린 풀들과 그늘을 나누고, 풀은 대지를 덮어 습기를 지킨다. 어느 것 하나 혼자서 살아가는 법 없이 서로 나누며 시련을 견딘다.

한때 녹보수의 생명이 다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분갈이를 하고 흙에 퇴비를 섞어도 잎이 시들어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시든 잎과 가지를 잘라냈다. 물주기와 햇빛 관리, 통풍에 신경을 쓰며 정성을 다하는 사이 나무도 역경을 견디고 있었다. 그 노력이 연둣빛 꽃으로 피었다.

여름은 내게도 흔적을 남겼다. 긴 외유 동안 만난 사람들과 낯선 풍경, 문화적인 충격은 마음의 결로 새겨졌다. 검게 탄 얼굴과 발목의 통증은 그 시간의 기록이다. 끈끈한 연대로 때로는 상처가 되던 가족 역시 경험 속에 자리한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태양을 견딘 증표이듯, 충격은 삶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덧난 마음이 치유되는 동안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도 달라지겠지.

폭풍우 뒤 더 옹골차게 성장하는 나무처럼, 우리도 상처를 통해 단단해진다. 상처를 동반한 성장이 여름의 일이라면 자신만의 회복루틴을 찾는 것 또한 삶의 방식이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아물고, 흔적은 남는다. 흠 없이 반듯한 것은 아름답다. 옹이와 흉을 새긴 생은 더욱 깊고 강하다.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