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숙의 문화모퉁이(25)]마중물

2025-09-10     경상일보

올 여름은 예년에 비해 더 강렬하고 길었다. 최근 아침 저녁으로 다소 선선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여전히 한낮의 뜨거운 햇살과 간혹 쏟아지는 소나기 때문인지 아직 여름이 완전히 끝나진 않은 것 같다. 사실 올 여름만 유난히 더웠던 건 아니다. 어릴 때 ‘역대급 폭염’을 경험한 기억이 난다. 한낮 기온은 37℃ 정도였는데 가정마다 에어컨이 있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차가운 물 속에 담가둔 수박을 먹거나 선풍기로 땀을 식히는 정도였다. 그리고 마당에 있는 펌프로 끌어올린 지하수로 등목을 하곤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뒷목과 등에 뿌려지면 그 순간에는 한여름의 더위가 다 가실 정도로 온몸이 오싹했다.

처음 펌프질을 하기 전에 펌프에 한 바가지 물을 먼저 부어야만 했던 것도 기억난다. 이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 부른다. 더 큰 물을 끌어내기 위해 먼저 마중을 나가는 물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그 작동 방식을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펌프는 고무막의 밀폐성을 유지해야 물을 퍼 올릴 수 있으며, 마중물은 이 고무막의 틈새를 막아 펌프 내부의 압력을 낮추고, 이를 통해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며 다시 한번 한국 문화 콘텐츠에 대한 자부심을 한껏 드높이고 있다. 그 애니메이션을 보진 않았을지라도, OST 곡을 한 번이라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극 중 루미라는 캐릭터의 노래를 작곡했을 뿐 아니라 직접 노래를 부른 이는 바로 이재 (EJAE, 실명은 김은재)라는 싱어송라이터이다. 이미 여러 유명한 케이팝 곡의 작곡가로서 이름이 나 있지만, 이번 기회에 대중에게 더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그의 독특한 이력이다. 2003년부터 10여년간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연습생 생활을 했고, 결국에는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최근 미국 ABC 방송의 굿모닝 아메리카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한 인터뷰 내용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때 너무 슬펐던 이유는 회사를 떠나게 된다는 것보다는, 꿈을 갖고 시작했던 11살의 아이를 실망시킨 것이에요.”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던 어린 자기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후 작곡 활동을 통해 연습생 시절을 정리하며 오늘의 음악으로 이어온 과정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 실패 경험은 그를 멈추게 하지 않았고, 삶을 다시 작동시키는 마중물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 이제 “잘했어(Good job). 수고했어”라고 칭찬해주고 싶다고 한다. 덧붙여,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잘했어”라고 토닥여주면 좋겠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 돌아보면 우리 인생의 여정도 그렇다. 어린 시절에는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고, 오직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조직 생활을 하며, 직책을 맡고, 자식을 키우면서 배운 것은 높은 봉우리가 있으면 그만큼 깊은 계곡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재가 말했듯, 그 길을 걸어온 나를 인정해주고 칭찬해줘야 늪에 빠졌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비록 노력 대비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더라도 언젠가는 그 과정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관대해져야 다음 목표를 향해 오를 힘을 얻을 준비를 할 수 있다. 더 큰 물을 끌어내기 위해 미리 흘려보내는 작은 시작, 그것이 마중물이다. 개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가 삶의 마중물이라면, 사회의 관대함은 공동체의 마중물이다. 실패한 개인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사회만이 성장할 수 있다.

최진숙 UNIST 교수·언어인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