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울산 전란사(14)]고려말 왜구의 침입과 민심의 동요

2025-09-19     경상일보

1. 고려말 왜구의 침입

전근대의 시대에 경상도 지역이 외적의 직접적 침입으로 피해를 크게 입은 경우는 거의 없다.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은 주로 서북 지역이 주요 침입로였고 평양, 개성, 서울 등의 도성이 주요 목적지였기 때문이다. 이의 예외적 경우가 있다. 13세기에 진행된 몽골의 침입이다. 고려 정부가 서울을 강화도로 옮긴 상태에서 몽골은 전국을 휩쓸었고, 그 과정에서 경상도 지역도 피해를 적지 않게 입었다. 이 시기에 경상도 지역이 외적의 직접적 침입을 받은 경우는 모두 일본으로부터이다. 긴 시간에 걸쳐 자주 침범한 것이 왜구이고 대규모로 침입한 것이 임진왜란이다. 왜구의 침입은 삼국시대에도 빈번했으며 그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가장 심했던 때는 여말선초이다. 특히 고려 말 약 40년간은 피해가 커서 고려 멸망의 한 요인이 됐다.

고려 때 왜구의 침입은 두 시기에 걸쳐 발생했다. 1223년(고종 10)에 왜구가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첫번째 침입이다. 이때는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가 몽골과 전쟁을 수행하던 기간이었다. 몽골이 일본을 침공하기 전인 1265년까지 왜구는 11회 고려를 침입한 기록이 있는데, 이를 ‘13세기 왜구’라고도 한다. 몽골의 2회에 걸친 일본 침공 이후 14세기 중엽까지 80여년 동안 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충정왕 20)부터였다. 이를 ‘후기 왜구’라고도 부른다. 우왕 때는 재위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았다.

공민왕 시기 후반부터 왜구의 침입과 약탈은 연해 지방에만 그치지 않고 내륙까지 그 활동 범위가 넓어졌다. 이 시기 왜구의 고려 침략은 정치적 혹은 문화적 목적보다는 경제적 목적이 가장 컸다. 이때의 왜구들은 주로 쌀을 개경으로 운반하는 조운선을 공격하거나 양곡을 저장한 창고, 특히 해안 지방의 조창 등을 약탈했다. 이 때문에 고려의 연해 지역은 쌀 생산이 급격히 감소했고, 조운이 어렵게 됨에 따라 조세의 운반은 육지를 통해 진행됐다. 왜구들은 기존과 같이 해안 지방이나 조운선의 약탈만으로는 자신들의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됐다. 이에 1370년대에 이르면 왜구들의 활동 범위가 내륙 지방으로 확대됐다.

대규모 왜구의 빈번한 침략으로 인해 고려가 입은 피해는 심각했다. 경제적인 피해가 가장 컸다. 왜구의 약탈로 민생이 어려워져 세금을 감면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조운선과 조창이 약탈당하게 되면서 고려는 국가 재정위기에 빠졌다. 조운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조세를 육지로 운송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왜구의 침략은 사회의 불안과 혼란을 불러왔다. 경제적 약탈 이외에도 이들은 침략 때마다 많은 주민들을 죽이고 또 포로로 잡아갔다. 일반 민가를 불태우고 파괴해 공민왕 집권기 후반에는 그 피해 때문에 사람들이 “해안 50리 혹은 30, 40리 떨어진 곳에서야 살 수 있다”라고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2. 민심의 동요

민심이 동요되기 시작한 것은 왜구의 침구가 극성이었던 우왕 때부터였다. 물론 공민왕 때에도 왜구의 침입이 적지 않았지만,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침입이 많았던 우왕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우왕 때 왜구의 특징은 ① 행동 범위가 북쪽의 의주 부근까지 미쳤고 ② 경상, 전라지방에는 오지까지 침입했으며, ③ 대규모의 기병대가 나타나고 ④ 화척, 재인 등 적지 않은 고려의 천민 집단이 가왜로서 활동하는 등 그 범위가 넓어지고 내륙 깊숙이까지 침입했다는 점이다. 우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종전에는 왜구가 침구해 사람들은 죽이지 않았는데 전라도 원수 김선치가 항복한 왜장 후지 쯔네미츠(藤經光)을 꾀어 죽이려다 탄로나자 이로부터 매번 침입할 때마다 부녀와 어린 아이들을 남기지 않고 죽였다는 기록(<고려사절요> 권30, 우왕 원년 11월)은 당시 백성들에게 왜구의 침구가 공포의 대상으로 변하게 됐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왜구의 침략과 약탈로 백성들의 고초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이에 따라 민심은 동요되기 시작했다. 왜구의 침략 목적이 물적, 인적 자원의 약탈이었기 때문에 왜구들은 닥치는 대로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대부분은 동요될 수밖에 없었고 서로 모여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동요는 가장 하위 신분인 노비와 일반 민에 의해서 표출됐다. 이와 관련해 아래의 기록을 보자.

①경상도 합주(지금의 합천)에 사노(私奴)가 있는데 검대장군이라 지칭하고…무리를 모아 떼를 지어 다니며 노략질하고 그 곳의 상전과 수령을 죽이고 반란을 꾀하려 하므로 안렴사 안경공이 잡아서 베었다.

②요망한 백성 이금(伊金)을 베었다. 이금은 고성 백성인데 미륵불이라 자칭하고 여러 사람을 속이기를, 재물을 남에게 나눠주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다. 우매한 백성들이…재물이 있는 자는 모두 남에게 줬다. 또 말하기를 “내가 명령해 산천 귀신들을 모두 일본에 보내면 왜구를 쉽게 사로잡을 수 있다.”…무뢰배들이 서로 제자라고 자칭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니 가는 곳마다 고을의 수령들이 나와서 영접해 상등 사관에 유숙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고려사절요> 권31, 신우 8년 5월)

위의 두 기록은 모두 왜구의 침구가 가장 많았던 경상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①은 사삿집 노비가 스스로 검대장군이라 이르고 무리를 모아 떼를 지어 다니며 반란을 꾀하려 했다는 내용이고, ②는 미륵신앙에 관계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떻든 고성 지방의 백성인 이금이 자신을 미륵불로 칭하고 여러 사람을 현혹했다는 내용이다. ②의 기사는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즉 이금은 당시 유달리 왜구의 소굴이라고 할 정도로 침구가 많았던 고성 지방의 사람이고, 이보다 3개월 전에도 이금과 같이 사노 무적이 자신을 미륵의 화신이라고 자처하다가 참형을 당한 적이 있었음(<고려사절요> 권31, 신우 8년 2월)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자칭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당시의 사회가 현실의 고통으로 인해 내세의 미륵불을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