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기로를 맞이한 한국 헬스테크
지난주 서울에서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가 열렸다. CES 같은 곳은 가본 적이 없지만 상대적으로 가기 쉬운 이런 행사는 꾸준히 참석해왔고 병원 운영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아왔던거 같다. 그러던게 몇 년전부터는 이전의 답습에 그치거나 정체되어 보이는등 조금 실망스러웠는데, 헬스테크 및 기기들이 현장에 활용되기까지 거치는 과정들이 만만치 않기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의료용 목적으로 생산된 소프트웨어 및 기기 장비들이 거치는 관문은 크게 두가지인데 첫째로 신의료기술평가를 통과해야 하며, 둘째로는 적정한 수가(가격)가 책정되어야 한다. 헬스테크 기기의 사용행위에 대한 수가 책정은 다른 분야와 다르게 정부가 엄격히 통제한다. 이런 단계가 하나 더 있는 이유는 헬스테크 기기가 결국 국민건강보험금과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신의료기술평가에서 심사가 오래 걸리거나 적절함 판명이 안되어 좌초되는 경우도, 실용적 수가 책정이 안되어 제대로 활용이 안되는 경우도 꽤 있다. 헬스테크 산업은 이렇듯 시간이 걸리고 인내가 필요한 분야다.
이런 제약을 고려해볼 때 올해 박람회는 개인적으로 좀 놀랐고 몇몇 회사, 특히 AI분야를 포함한 한국기업들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AI기술은 의료분야에서도 대세인데 현재까지는 영상 및 검사 장비들 위주로 이루어져 오고 있다. 필자가 일하는 울산병원은 관련된 AI 프로그램들을 조금 선제적으로 도입해 활용하는 편인데, 현재 쓰는 것만 해도 CT, MRI 검사 등에서 뇌출혈 및 뇌동맥류 여부를 AI로 검출하는 프로그램, 심전도 데이터를 활용해 심기능 이상 및 심정지 위험도를 판독하는 프로그램, 흉부 방사선 촬영 영상을 AI의 도움을 받아 이상 소견을 검출하는 프로그램 등 여러 가지다. 이중 흔히 말하는 의료수가(가격)가 정해지지 않아 현재는 그저 데모 형식으로만 쓰이는 것이 꽤 있고 당연히 의사를 대체하기보다 어디까지나 안전을 위한 보조적 역할을 하는 중이다. 관련 프로그램들을 써본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의 의견은 다양한 가운데 대체로 긍정적이다. 누가 봐도 알만한 병변을 지적하는 정도지만 실제로 해보니 그것만 해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는 반응이 많다. 심전도 관련 분석기기도 심장관련 전문의들은 생각보다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다.
발전하는 모습이 있다해도 영상 및 검사 분야에 한정적이었는데, 이번 박람회에선 이를 넘어 음성인식 의무기록 등 꽤 인상적인 기술들이 보였다. 음성인식 의무기록은 간단히 이야기해 의사와 환자가 진료를 볼 때 서로 대화하는 항목들이 전부 텍스트화 된채 기록되어 진료 중 따로 키보드로 입력할 필요가 없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이런 기술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사람의 대화라는게 정확한 형식의 틀에 맞춰서 하는게 아니므로 설령 텍스트화가 된다고 해도 내용 자체가 중구난방이라 그대로 쓰기 어렵고 혹 대화를 틀에 맞춰서 하도록 한다면 이 역시 진료과정 자체를 제한해 버리기에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박람회에서는 국내 AI 업체 중 한 곳에서 어떤 대화를 하든 아예 일정한 형식에 자동으로 요약해 의무기록에 집어넣어주는 프로그램을 전시했다.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신선했고, 답답했던 무언가가 뚫리는 기분이었다. 현장 활용 적합도는 직접 써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얼마전 정부에서 신의료기술평가를 3년간 유예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람의 건강을 다루는 만큼 규제를 모두 풀기보다 어느정도 제한은 있겠지만 큰 방향을 그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우려의 목소리들 이해가 간다. 이 사안의 긍정 또 부정적 면들을 여기서 다 논할 수는 없겠지만 ‘조심히 접근한다는 전제 하’에 기술혁신이라는 관점에선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나라 헬스테크 산업이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길 원한다면 정해진 지금 흐름은 기회가 될 것이다.
임성현 울산병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