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운의 울산인물 탐구(3)]열부 오천정씨(烏川鄭氏)

2025-09-23     경상일보

울산사람 중에는 울산이 과거 군영의 도시이기 때문에 유교에 바탕을 둔 효자·효부가 타 도시에 비해 적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최근 울산효문화선영회가 발표한 정각과 효부·효녀 숫자를 보면 울산이 타 도시에 효자·효부가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울산효문화선영회에 따르면 울산에는 조선시대 이후 지금까지 나라에서 효행을 인정해 왕이 직접 증명하고 칭송해 내린 정려각이 40여개나 되고 <울산읍지> 등 문헌과 기타 사적지에 기록된 효녀·열부가 450여명이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 경기도 과천과 충남 공주에 열녀와 효자가 많이 살았던 것으로 집계가 되고 있는데 숫자로 보면 울산이 이들 지역보다 훨씬 앞서는 것이다.

이중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열부가 오천정씨(烏川鄭氏)다. 1858년 태어나 1925년까지 살았던 정씨는 17살에 학성이씨 16세 종문(鍾文)에게 시집왔다. 시집와 보니 시조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모두 살아있어 정성을 다해 이들을 섬겼다.

그런데 그의 나이 20살 때인 고종 14년(1877) 장티푸스가 돌아 전 가족이 전염되어 시조부와 시아버지가 20여일 간격으로 타계하고 이어 남편마저 목숨을 잃었다. 남편이 생사고비에 섰을 때 그는 손가락을 잘라 생 혈을 먹이는 등 남편을 살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으나 결국 남편이 17세에 요절하는 바람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정씨는 남편이 죽은 후 자신도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죽으려 했으나 시어머니가 “네가 죽으면 늙은 나는 누구를 의지해 살아가고, 너의 남편 3년 상은 누가 치른단 말이냐”며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죽음을 포기해야 했다.

이후 그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면서 밤낮으로 열심히 일해 집안 경제를 일으켰고 두 명의 시동생도 잘 보살펴 키운 후 적령기에 결혼시켰다. 이후 어미를 잃은 세살배기 큰 질녀도 집으로 데려와 친자식처럼 키워 나중에 좋은 배우자에게 출가시켰다. 또 가문을 잇기 위해 일가 중 종기(鍾琪) 장남 중락(中洛)을 양자로 삼으니 주위 사람 모두가 정씨를 세상에 보기 드문 열부라고 칭찬했다.

정씨의 이런 행적은 단산(丹山) 김상우(金相宇, 1888~1962)가 <절부전>이라는 책에서 찬미했고 <울산읍지>와 <흥려승람>에도 남아 있다. 단산은 당대 석학으로 작천정 반석에는 그의 <작천정중수기>가 새겨져 있다

이수원 울주문화원 부원장은 오랫동안 학성이씨 자료를 집대성 한 후 이를 바탕으로 <학성세고>를 사재로 발간했는데 이 책 ‘인물란’에는 효자, 효부, 열행, 자선가가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중 정씨 행적은 ‘열행편’에서 볼 수 있다.

정씨 산소는 현재 양산시 웅상읍 양곡리에 있는데 이곳에는 후손은 물론이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정씨의 행적이 묘비로 남아 있다. 울산 남구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냈던 채익(埰益)이 정씨 현손(玄孫)이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