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4장 / 의병장 윤홍명과 이눌(51)
토지문서를 잘 갈무리해 놓은 후에 천동과 동무들은 마동마을에서 파군산 골짜기 쪽으로 올라가며 사냥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잡아먹어서인지 동물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산 중턱을 지나고 칠 부 능선 쯤에서 겨우 토끼 한 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더 이상의 사냥은 불가능할 것 같았고, 욕심 부리지 않으려고 계곡에서 토끼를 손질해 통구이를 만든 후에 그것을 뜯으며 놀이를 마무리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동마을에 들러서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얼마간의 볍씨를 구해서 송내로 돌아갔다. 나중에 논을 사게 되면 꼭 벼농사를 지을 요량으로 조금씩 모아놓은 볍씨와 오늘 얻어온 볍씨를 합하니 다소 부족하기는 하지만 올해 당장 모내기를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는 비록 백정의 자식이었지만 굶어죽을 상황에서도 종자로 사용할 씨는 반드시 남겨두는 농군들의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에, 이 힘든 난리 중에도 파종이 가능했던 것이다. 왜군이 아니어도 파종할 씨앗이 남아있지 않아서 휴경지가 되어버린 전답이 태반인 지금의 상황에서 파종을 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행운이었다. 아마도 김 초시가 논을 판 이유도 농사지을 하인들이 죽고 없는 데다가, 종자로 쓸 볍씨도 한 톨 남아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천동은 꼭꼭 숨겨놓았던 농기구들도 꺼내서 본격적인 농사 준비를 했다. 비록 다 쓰러져가는 초막이었지만 동무들을 불러모아서 손질하고 쓸고 닦으니, 그래도 거지 움막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국화에게 말했던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돼서야 천동은 무룡산의 동굴로 돌아갔다.
가기 전에 천동은 동무들에게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가을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라고 말했다. 산에 나는 것들이나 송내의 개울, 쇠내 등지로 가서 뭐든지 잡아먹고 파종 때까지 버티라고 단단히 일렀다. 올 가을에 첫 수확을 하면 나라에 바칠 세금을 뺀 나머지 중에서 절반은 동무들에게 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동무들도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종자는 손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연후에 천동은 다시 동굴집이 있는 산을 오른 것이다.
이 무렵 울산은 물론 경주지역의 의병들도 대부분 해산되어서 농사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농지에 비해서 농사를 지을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농사지을 종자가 없어서 휴경지는 여전히 많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못했던 휴경지는 대부분 황무지나 마찬가지로 되어버려서 농지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노비들이 전쟁에 동원되어서 다 죽어버린 양반의 경우는 땅은 있되 농사지을 일꾼이 없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소작을 부치던 양민들은 지주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종자 부족으로 농사를 포기하고 초근목피로 연명하였으며, 일부는 강이나 바다로 나가서 고기잡이로 목숨을 부지하였다.
동굴집으로 간 천동은 국화를 설득해서 마을로 내려가자고 했다. 천동의 초막 옆에 거처를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썩 내키지 않는 모습이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