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미국 비자 너머의 세계
비자(visa)는 외국인에 대해 그 나라에 입국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입국허가 확인증으로, 우리말로는 사증(査證)이라 한다. 관광이나 단기 방문 등의 목적으로 입국 시 무비자 협정(visa waiver program)에 따라 비자 없이 자국 입국을 허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외국인이 입국해 적법하게 체류하기 위해서는 해당국으로부터 관련 체류 목적에 부합하는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비자는 체류 기간과 목적, 그리고 국가별로 그 종류가 천차만별이며, 해당국의 출입국 정책에 따라 발급의 난이도가 다르다. 최근 미국이 외국인 전문직 종사자를 자국의 고용주가 임시로 고용할 경우 필요한 H-1B 비자의 발급 수수료를 기존의 1500달러에서 10만달러로 인상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공포했는데, 이 역시 올 한 해 내내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었던 미국의 관세 정책 변경과 같이 자국민을 위한 일자리 창출이라는 현 미국 트럼프 정부의 정책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한국인이 미국 입국 시 주로 신청하는 미국 비자로는 관광 등 일반 목적 단기 방문 시 사용되는 ESTA부터 유학 비자인 F-1, 단기 상업 방문용 B-1, 투자 목적 E-2, 일명 주재원 비자라 불리우는 L-1 등이 있다. 이번 미국 정부의 행정명령 대상이 된 H-1B는 다른 비자들과 마찬가지로 최대 3년이라는 체류기간의 제한이 있으나 미국 내에서 정식으로 급여를 받으며 일하는 것을 허용하는 전문직 비이민 비자라는 면에서 다른 비자들과 구별된다.
인력 수급 관점에서 미국 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있기 때문에, H-1B는 신청 인원에 일정한 제한을 두고 있다. 2004년 이후 미국 정부는 신청 가능한 H-1B 비자의 수를 8만5000개로 제한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2만개는 미국 대학에서 석사 학위 이상을 취득한 신청자에게 할당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발표한 관련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H-1B 비자로 인해 확보된 외국의 우수 전문인력들을 채용하는 미국 기업들에는 아마존, 타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그리고 구글 등 이른바 빅 테크 기술 기업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다. 이들 기업에 H-1B 비자를 통해 취업하는 인력들의 출신국은 인도가 71%로 가장 높으며, 중국이 11.7%로 그 뒤를 잇고 있다.
허용활동의 범위에서 알 수 있듯이, H-1B 비자는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가는 외국인들에게 있어서 최우선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목표라는 상징성이 있다. 이러한 H-1B 비자를 신청하는 데 필요한 비용 요건을 단숨에 100배 가까이 올린 금번 행정명령은 미국 대학 유학 등을 거쳐 취업 이민을 원하는 이들의 미국 안착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불법체류자들을 대상으로 한 기존의 반이민정책이 미국 내 농업,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시장의 공급 공백을 초래하였다면, 이번 규제 강화는 해당 비자 프로그램을 신청하는 외국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미국 내 관련 노동시장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를 어렵게 만들 것인데, 그 반대편에는 해외 유학생들의 등록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운영되는 미국의 대학들과 해외 출신의 전문인력들만이 제공할 수 있는 저비용 고효율의 사업구조 위에서 영위되는 기업들이 있다. 이번 행정명령으로 인해 이들 학교와 기업들은 순차적으로 학생과 인력 유치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인데, 이는 시차를 두고 미국 산업 전반의 생산성과 혁신의 제고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일극 체제 내의 절묘한 균형 하에 가능했던 글로벌 분업 체계가 여러 면에서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번 미국 정부의 비자 정책 변화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된다. 블록화되는 글로벌 공급망, 경제 안보 시대의 도래와 다극화 체제로의 재편 등 우리가 이전에 이해하던 세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기업도 개인도,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으로 세상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때다.
이준희 미국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