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4장 / 의병장 윤홍명과 이눌(54)

2025-09-26     차형석 기자

그 일은 마을 사람들이 천동을 다시 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검술을 익히면서 생긴 자신감으로 인해서 천동은 마을 사람들과 잘 소통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심을 얻은 천동은 마을 뒷산의 주인을 설득해서 다른 산에서 캔 더덕과 도라지를 그곳에 제법 많이 심어 놓았다. 번식력이 좋은 정구지나 취나물, 산마늘 등의 산나물도 심었다. 굶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천동의 마음은 부자가 된 것 같이 넉넉해졌다. 그렇지만 국화는 양반 댁에서 생활하던 사람이었기에 천동은 그녀가 늘 신경 쓰였다.

“누님, 여러 가지로 많이 불편하시죠?”

“자왈(子曰) 반소사(飯疏食)하고 음수(飮水)하고 곡굉이침지(曲肱而枕之)라도 낙역재기중의(樂亦在其中矣)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며 팔을 굽혀 베고 눕더라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고 했다. 난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이 좋아. 그러니 신경 쓰지 마.”

“양반 댁 마님들도 사서를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누님은 언제 그걸 읽으셨어요? 대단하네요.”

“어려서 오빠가 공부하는 거 보고 떼를 써서 배웠어. 나보다 내 말을 알아듣는 동생이 더 대단한 거 아닌가?”

“그런가요? 하긴,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죠. 나 같은 천민이 사서를 배워서 무엇에 쓰겠다고…….”

“미안,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해. 그리고 동생, 정말 난 지금이 좋아. 여기 와서 알았어. 사람이 사는 데 좋은 옷과 풍족한 음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거. 동생 덕분에 그걸 알게 되어서 기뻐.”

그녀의 표정을 보니 그 말에 진심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혼자 살 때와는 달리 여러 가지로 신경을 많이 썼다. 굶는 데 이력이 난 그와는 달리 양반 댁 마님이었던 그녀에게는 분명히 가난이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삼월에 보부상단에 있는 대산이 형에게 도움을 청했었다. 그렇게 구한 오이씨는 담장 따라서 빼곡하게 심어 놓았고, 참외는 텃밭에 넉넉하게 심었다.

1595년 5월(음력), 조선의 백성들은 모처럼 찾아온 평화로운 시간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살림살이에 목숨을 연명할 식량이 될 만한 것을 찾느라고 산과 강을 헤집고 다녔다. 몇 년째 지속되고 있는 흉년으로 농사를 짓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정작 농사지을 종자가 없어서 태반은 농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삼천리 방방곡곡 백성들의 배고픔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얼굴은 다소 편안해졌다. 백성들의 배고픔과는 달리 한양의 주상 이연의 비자금 창고인 내탕고에는 기름진 곡물들이 넘쳐났다. 경기지역의 옥토는 대부분 왕실의 소유였기 때문에 전쟁 중에도 양식이 썩어나갈 정도로 차고 넘쳤다. 그렇지만 조선왕 이연은 백성들의 죽음 앞에서도 결코 내탕고를 열지 않았다. 심지어 왜군과 싸우는 병졸들조차 군량미 부족으로 쓰러져 죽어갔지만, 끝내 임금은 그것을 외면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