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이장욱 ‘소규모 인생 계획’

2025-09-29     경상일보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인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한 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 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 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달콤한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 올랐다.



생존에 급급, 팍팍한 삶을 사는 우리 모습

소규모가 좋지. 거창하고 허황한 것보다 작더라도 실현 가능성 있는 계획이. 미니멀리즘이 유행이잖아, 라고 생각하며 본문을 읽다 보면 다소 당황하게 된다. 시는 첫 행부터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 먹는 비루한 삶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나 봄과 같이 특별하고 희망이 샘솟아야 할 때 오히려 인색해지는, 미래를 대비하는 생명보험조차 해지해야 하는, 친구와의 관계도 거의 끊어진 삶. 개인의 삶만 비루하고 팍팍한 게 아니다. 지구촌 어디에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우리는 자연을 훼손함으로써 펭귄과 북극곰의 생존마저 위협한다.

그러니까 ‘소규모’라는 것은, 하루하루 생존에 급급한 우리의 모습이다. 내일이 없으므로 모레는 비현실적으로 황홀하게 느껴진다. 헛된 이상이라도 품어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딜 수 있으므로. ‘위대한 자들’은 아마 사회적으로 성공한 상층부의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혐오’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편입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기저를 이루는 우리 소규모 인생에 의해 사회가 달콤한 빵처럼 유지가 되는, 저 양극화의 얼굴.

그나마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에서 위안을 얻어야 할까. 부디 그들은 부드럽게 태어난 것처럼 부드럽게 자라기를. 다정함 속에서 성장하기를.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