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주연의 법칙

2025-10-01     경상일보

“너 내 동료가 돼라!”. X자가 그려진 왼손을 번쩍 드는 동료의 증표를 아는가? 최근 만화 극장판을 상영하는 영화관에서 어른들이 울고 웃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보호자가 아니었다. 모두가 바보상자 속 이야기에 몰입하는 아이였고, 채널 38번을 잊지 못한 열혈 시청자였다. 마음속에 알 하나씩 품고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우물을 통해 요괴의 세계로 넘어간 학생, 요술봉으로 카드에 악령을 봉인하는 소녀, 마을을 떠돌며 공으로 괴물을 모으는 소년. 호기로운 탓에 겁도 없는 주인공이 최종화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분명, 동료일 것이다. 누군가를 지키거나 세상을 구할 목표 앞에 하루걸러 난관이 펼쳐진다. 그래도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고단한 여정도 끝까지 견뎌낼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친구보다 동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허물없는 사이만큼 선을 지키며 공통분모를 가진 관계 역시 귀하다. 가뭄에 좁고 깊은 우물이 막혀 버리더라도 넓고 얕은 구덩이가 이곳저곳 파여 있다면 가랑비에도 생존할 기회가 생긴다.

직장에서도 동료는 존재한다. 문과 벽으로 분리된 공간에 있지만, 이제는 안다. 교실은 섬이 아니라 점이라는 것을. 점은 떨어져 있어도 그 사이를 연결하면 선이 된다. 얼마 전 책 <액스>를 읽고 이 문장에 밑줄을 쳤다. ‘누구나 세상 어딘가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하나쯤은 필요하잖아요.’ 가로 9m, 세로 7.5m의 네모난 공간, 교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곳에 속한 학생들 역시 동료가 있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친구’라고 부르는 시대는 저물었다. 최근 학급에서 ‘짝꿍 제도’를 주제로 토의가 열렸다. 짝을 정할 때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가 오면 싫은 내색을 하거나 배타적으로 대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긴 토의를 거친 후, 아이들의 소감은 “인간관계가 역시 제일 어려워요, 선생님”. 합보다는 화에 초점을 맞춘 생활 지도는 친해지는 것보다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경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하나야’보다는 ‘우리는 타인이야. 그러니 존중하자.’에 가깝다. 다만 개개인의 호불호를 존중하는 곳에 다수의 불호에 든 아이는 어떻게 무리에 속할 수 있을까? 어린 동생들도 놀이에 끼워주던 깍두기 문화가 사라진 시대에 배려를 강요할 수는 없기에 고민이 된다.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영웅의 필요조건은 조력자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세계관 최강자로 살아간다. 또 다른 조건인 시련을 견뎌내느라 숨 돌릴 시간도 빠듯하다. 이때 다른 세계관에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코난이 소파 뒤에 있다가 소년탐정 김전일과 만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주인공이 아니면 다른 이의 서사에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 적대자, 조력자, 단역…무엇을 고르듯 우리의 선택이다. 삼인칭의 세계가 무탈하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누군가의 세계관에 조심스레 접속한다. 단 한 번뿐인 삶 속에 적의보다는 선의를 택하려 노력하면서.

배상아 울산 복산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