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디지털 제품 여권의 확산: 산업을 넘어 사회로

2025-10-02     경상일보

디지털 제품 여권(Digital Product Passport)은 더 이상 개념적 논의나 제한된 산업의 실험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본격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규제 강화와 글로벌 기업들의 선제적 대응이 맞물리면서, 전기차 배터리를 넘어 가전, 섬유, 식품 등 다양한 산업에서 디지털 제품 여권 도입이 빠르게 가속화되고 있다. 이제 디지털 제품 여권은 순환경제 촉진을 위한 기술적 장치에서 나아가 소비자, 정부, 기업 모두의 행동 변화를 이끄는 제도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패션 산업에서는 지속 가능성과 윤리적 소비를 위한 도입이 활발하다. 유럽의 주요 의류 브랜드들은 섬유 소재의 출처, 친환경 염색 공정 여부, 노동권 보호 여부 등을 디지털 제품 여권에 담아 제공하고 있다. 소비자는 QR 코드를 통해 해당 의류가 어떤 원료로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거쳐 판매되는지 즉시 확인할 수 있다. 단순히 옷을 사는 행위가 아니라, ‘책임 있는 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친환경 섬유를 활용하는 일부 패션 기업들이 비슷한 시스템 도입을 검토 중이다.

식품 산업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유럽에서는 유기농 농산물에 대해 생산지, 농법, 물 사용량, 탄소 배출량 등을 기록한 디지털 여권을 제공하고 있으며, 일부 초콜릿과 커피 브랜드는 공정무역 인증 정보까지 연동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농수산 식품에 대해 GS1 기반 이력관리 체계를 확대 적용하며 디지털 여권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이는 소비자에게 안전성과 신뢰를 제공하는 동시에, 수출 시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경쟁력 확보 수단이 된다.

가전제품 분야에서도 디지털 제품 여권은 주목받고 있다. 유럽연합은 냉장고, 세탁기, TV 등 주요 가전에 대해 수리 가능성, 교체 부품 정보, 에너지 효율 등 주요 정보를 포함한 여권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일부 제조사는 이미 자체 서비스 플랫폼에 부품 교체 매뉴얼과 에너지 효율 데이터를 공개해 소비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기업들도 이와 유사한 디지털 이력 관리 체계를 시험 운영 중이다. 이는 제품의 수명 연장과 전자 폐기물 감축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의약품과 화장품 산업에서는 위조 방지와 안전성 확보를 위해 디지털 제품 여권 도입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제약사는 의약품의 원료 성분, 제조일자, 운송 온도, 유통기한 등을 여권에 기록해 환자와 병원이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일부 화장품 브랜드는 원료의 안전성, 동물실험 여부, 친환경 포장재 사용 여부를 기록한 QR 기반 제품 이력 카드를 제공하고 있다. 이는 브랜드 신뢰 제고와 글로벌 시장 진출 모두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제도의 확산은 기술적 장벽을 넘어서는 도전 과제를 동반한다. 동일 제품군이라도 제조사마다 기록 항목과 형식이 달라 데이터 표준화가 시급하며, 산업 간·국가 간 합의 없이는 연동이 어렵다. 또한 원자재 공급자부터 완성품 제조사, 유통업체, 재활용업체까지 연결되는 공급망 전체 협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은 초기 시스템 구축 비용과 인력 확보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에 정부의 지원 정책이 필수적이다.

디지털 제품 여권은 단순한 데이터 관리 수단을 넘어 탄소중립과 ESG 경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EU는 향후 제품의 환경 성과를 점수화한 ‘에코스코어(Eco Score)’를 도입하고, 이를 근거로 시장 접근 권한이나 세제 혜택을 차등 적용할 계획이다. 이는 곧 기업의 수출 경쟁력과 직결되며, 한국 기업들 역시 선제적 대응 없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결국 디지털 제품 여권은 ‘디지털 전환’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 이를 단순한 규제가 아닌 혁신의 기회로 인식할 때, 제품의 전 생애주기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적 자산이 될 수 있다. 기술, 제도, 협력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한국 산업이 디지털 제품 여권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무대에서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권상진 연세대학교 산업공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