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40년 전의 낡은 법, 이제는 국민의 안전을 품어야 한다
우리 곁에는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우리 집 불빛이 되고, 아이들의 공부방을 밝히며, 산업 현장을 움직인다. 그러나 전기 뒤에는 언제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원전은 편리함과 위험이 함께 따라붙는 양날의 칼이다. 1978년에 만들어진 원전발전지원법은 이런 원전과 함께 출발했다. 그 시절에는 원전의 위험을 충분히 알지 못했다. 체르노빌도, 후쿠시마도 아직 세상에 오지 않았다. 그래서 법은 원전 반경 5㎞ 안에 사는 주민들에게만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 단순하게 설계되었다. ‘원전 곁에서 사는 불편을 돈으로 보상한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변했고 우리의 인식도 달라졌다. 국민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안전을 원한다. 생명과 건강, 그리고 미래 세대의 삶을 지켜줄 제도를 바란다. 하지만 법은 아직도 1978년에 머물러 있다.
법은 원전 반경 5㎞를 기준으로 한다. 그 안에 사는 사람만 지원 대상이고, 그 밖에 사는 사람은 아무 권리도 없다. 그런데 방사능은 과연 5㎞에서 멈출까. 체르노빌 사고는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후쿠시마 사고 때는 30㎞ 바깥까지 주민들이 대피해야 했다. 바람이 부는 방향, 비가 내리는 시간에 따라 피해 범위는 수십, 수백㎞까지 넓어진다. 그럼에도 우리 법은 여전히 5㎞라는 숫자에 갇혀 있다. 마치 강물이 넘쳐 흐르는데도 ‘제방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다’고 고집하는 꼴이다. 이 협소한 기준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울산 서생지역 외 인접 주민들은 원전과 불과 5㎞선 밖이라는 이유로 지원과 보상에서 배제된다. 사고가 나면 피해를 똑같이 입을 수 있는데, 법은 그들을 외면하고 있는 셈이다. 현행법은 주민들에게 지원금을 주는 것에 집중한다. 하지만 원전이 터졌을 때, 그 돈이 무슨 소용일까. 후쿠시마 사고 이후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일본 주민들은 지금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보상금으로는 잃어버린 삶을 되찾을 수 없다. 진짜 필요한 것은 사고를 막는 철저한 안전 점검, 사고가 났을 때 국가가 책임지고 대피·치료·보상하는 체계, 그리고 주민과 함께 만드는 신뢰다. 원전은 주민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민들은 원전 정책의 당사자이면서도, 법과 제도에서는 철저히 소외되었다. 건설 여부를 결정할 때도, 운영을 점검할 때도, 주민의 목소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원전은 주민과 함께할 때만 정당성을 얻는다. 주민 협의체, 공청회, 주민투표 같은 제도를 통해 그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원전을 떠안고 살아가는 주민이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주체’가 되어야 한다.
세계는 이미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체르노빌은 강제 이주와 세대에 걸친 고통을 남겼고, 후쿠시마는 일본 전체를 뒤흔들었다. 국제사회는 원전 안전 기준을 크게 강화했다. 사고 발생 시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피해 보상과 주민 대피를 법으로 담았다. 그러나 우리 법은 여전히 지원금이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다. 세계의 기준에서 보면 뒤처진 셈이다. 새울원전 5·6호기 건설이 추진되는 지금, 우리는 중대 기로에 서 있다. 낡은 법을 개정하지 않고 새 원전을 논의한다는 것은 국민의 안전을 외면하는 것이다. 지원 범위를 넓히고, 안전성 확보를 법으로 담아야 한다. 국가가 책임지고 주민을 지켜야 하며, 피해 보상 체계를 고쳐야 한다. 건강과 생계, 미래까지 지켜주는 보상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주민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주민 없는 원전은 결코 정당할 수 없다.
법은 시대의 거울이다. 그러나 원전발전지원법은 이미 깨진 거울이 되었다. 1978년의 낡은 잣대는 더 이상 오늘을 비추지 못한다. 국민은 단순히 지원금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안전하게 살 권리, 사고가 나면 보호받을 권리, 미래 세대에게 깨끗한 터전을 물려줄 권리를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국가가 국민에게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원전발전지원법의 개정은 선택이 아니다. 의무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미래를 지키기 위한 출발점이어야 한다. 정부와 국회는 국민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미래 세대를 위한 안전망은 법을 고치는 일에서 시작된다.
권오룡 울산시체육·문화정책자문위원
※외부원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