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숙의 문화모퉁이(26)]살리려 하지 말고, 살게 하라
최근 김해시에서 화포천습지 과학관 개관식을 하면서 방사한 천연기념물 황새 한 마리가 폐사했다. 2022년 충남 예산 황새 복원을 위해 들여온 황새 암수 한 쌍과 올해 3월 화포천 습지에서 부화에 성공한 황새를 포함해 총 세 마리가 방사될 예정이었다.
방사는 시장, 국회의원 등 주요 내빈 연설이 끝난 뒤 이뤄졌는데, 당시 황새들은 좁은 새장에 1시간40분가량 갇혀 있었으며, 외부 기온은 약 22℃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에 나온 비디오를 보니 행사 당일 황새는 새장의 문이 열리자 조련사에 의해 부리를 잡힌 채 끌려나와 몇 걸음 걷더니 앞의 구덩이에 맥 없이 고꾸라졌다. 인간이 되살리고자 한 ‘자연의 상징’이 인간의 손에 의해 생을 마감한 셈이다.
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인간이 여전히 자연을 ‘전시’하려는 태도, 즉 타자를 대상화하고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선의를 증명하려는 욕망의 결과로 보인다. 많은 지방정부는 최근 ‘생태 복원’이라는 이름 아래 황새, 반달가슴곰, 수달 등을 복원 사업의 아이콘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 ‘복원’은 대개 보여주기식 행정의 전시나 다름없다. 생태계 회복이라기보다,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도덕적 자화상 만들기에 가깝다. 인류학자 토니 베넷(Tony Bennett)에 따르면, 권력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세계를 진열함으로써 그 힘을 과시하는데, ‘전시 복합체’(exhibitionary complex)라 불리는 동물원, 박물관, 세계박람회가 바로 그런 공간이다. 전시를 통해 실제로 자연을 회복하기보다, 자연을 도덕적 자산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새는 ‘환경을 생각하는 도시’의 로고가 되는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 아닐까. 황새의 날개에 자신들의 이름표를 매달고 ‘자연과의 공존’을 외칠 뿐, 정치인들이 진짜로 복원하고 싶은 것은 생태가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첫째 아이가 어렸을 때 소위 ‘체험 동물원’에 데려갔었다. 처음 갔을 때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아 재방문을 한 날이었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먹이를 주는 체험을 할 수 있는 동물원인데, 문제는 관객들이 아무 것이나 먹인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눈 앞에서 당나귀에게 나무 젓가락에 있는 핫도그를 먹이다가 당나귀가 그만 뾰족한 젓가락까지 먹어버려서 헛구역질을 하는 장면을 보고는 그 날 이후 다시는 그 동물원에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물원에서 동물을 보면서 배울 수 있도록 잘 설계된 국내외 동물원을 많이 다녔지만, 동물을 유리창 밖에서 보거나 창살 사이로 구경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우리가 만든 세계의 주인공이길 원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존재를 유리 벽, 철창살 안에 가둬놓고, 그들을 보며 ‘생명의 신비’를 이야기한다. 인간이 오히려 동물처럼 울타리 안에서 권력을 나누고, 보여주기 경쟁에 매몰돼 있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전시 행정에 이용된 동물 이슈는 단지 정치인들만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스마트폰 속에서 타인의 삶을 구경하고, 알고리즘이 던져주는 전시물에 열광한다.
3년 전 동물원을 탈출한 후 거리를 활보하다가 사진이 찍힌 얼룩말 세로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철창을 넘어 거리를 활보하는 세로를 ‘이색적인 풍경’의 한 장면으로 기억한다. 골목길에 들어선 세로가 오토바이에 탄 배달부와 마주친 그 장면. 세로의 탈출을 위한 몸부림은 생명보다 이미지가, 관계보다 이벤트가 앞서는 사회를 향한 은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태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복원’과 ‘보존’은 다르다. 복원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의 산물이고, 보존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살아 있는 동물을 ‘전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로 기억하는 사회가 돼야 하지 않을까. 짧은 생을 마친 그 황새가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는 바로 “나를 살리려 하지 말고, 그냥 살게 해주세요”일 것이다.
최진숙 UNIST 교수·언어인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