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회색 코뿔소는 이미 운동장을 달리고 있다
‘회색 코뿔소(Gray Rhino)’란 멀리서도 뚜렷이 보이지만, 모두가 외면한 채 다가오도록 방치하는 거대한 위험을 뜻한다. 2025년의 한국 교육도 바로 그 회색 코뿔소와 마주하고 있다.
위기는 예고 없이 오지 않는다. 이미 예고된 징후를 읽지 못한 사회만이 충돌의 대가를 치를 뿐이다. 현 교육의 회색 코뿔소 5대 징후를 정리해 본다.
첫 번째, AI 시대, 교사의 역할 재정의가 지연되고 있다. 생성형 AI가 교실 안으로 들어온 지 오래다. 학생들은 수학 풀이를 GPT에게 맡기고, 에세이를 AI와 함께 쓰며, AI 튜터로 개인 맞춤 학습을 한다. 그러나 정작 교사는 여전히 ‘지식 전달자’의 자리에 머문다. 교사 연수체계는 기술활용보다는 행정 절차 중심이고, 학교 현장은 AI 활용의 윤리나 평가 기준에 대한 합의조차 없다. AI가 교사를 대체하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다. 진짜 문제는 AI 시대에 맞는 교사의 역할을 스스로 재정의하지 못한 채, 변화가 교사를 덮치도록 내버려 두는 현실이다. AI는 이미 교실 안에 있다.
두 번째, 학생 수는 급감하지만, 학교 구조는 20년 전 그대로다. 출생률 0.6의 시대, 전국 초등학교 절반이 ‘학생 수 100명 미만’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학급 편성 기준, 교원 배치, 학교 행정 시스템은 변하지 않는다. ‘통폐합’ 논의는 행정 효율에만 초점을 맞추고, 정작 ‘작은 학교의 미래적 가치’는 외면 당한다. 한편으로는 도시의 과밀학급이 여전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교실이 비어간다. 아이보다 교실이 많은 나라, 이것이 교육의 구조적 회색 코뿔소다. 학교는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다. 학교가 사라진다는 건, 한 지역의 미래가 함께 사라진다는 뜻이다.
세 번째, 시험 중심 교육이 실생활 역량 교육을 삼켜버렸다. AI, 기후위기, 글로벌 불확실성 속에서 필요한 것은 ‘문제 해결력·적응력·시민적 책임감’이다. 그러나 여전히 학교는 학생에게 묻는다. “이걸 암기했느냐?” ‘문해력·수리력’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식을 실제 상황에서 적용하고 협력하며 판단하는 능력은 시험지로 측정되지 않는다. OECD는 한국 교육의 ‘지식형 성취’는 세계 최고지만 ‘창의·적응·자기주도성’은 평균 이하라고 지적한다. 이 괴리는 이미 오래된 문제이지만, 아무도 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시험의 늪’에 빠진 공교육, 이것이 세 번째 회색 코뿔소다.
네 번째, 교실이 비어간다. 출결이 떨어지고, 학습 결손보다 더 심각한 ‘참여 결손(engagement gap)’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가 재미없다”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떠난 것이 아니라, 무관심 속에 서서히 학교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정신건강 악화, 디지털 중독, 교사와의 단절, 그리고 학부모와의 갈등이 맞물린다. 그럼에도 학교는 ‘출결관리’와 ‘생활기록부’로만 대응한다. 관계가 무너진 교실에서 배움은 뿌리내릴 수 없다. 교육의 본질은 ‘지식전달’이 아니라 ‘사람과의 연결’이다. 텅 빈 교실보다 더 두려운 것은 관계가 사라진 교실이다.
마지막 회색코뿔소는 교육의 신뢰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 정책은 쏟아지지만 현장은 피로하다. 학부모는 정책을 믿지 않고, 교사는 제도를 신뢰하지 않으며, 학생은 학교를 신뢰하지 않는다. 교육은 사회적 합의 위에 세워져야 하지만, 지금은 불신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이 불신은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교육의 심장을 약화시킨다. 교사-학부모 갈등, 입시 불투명, 공교육 불신, 사교육 의존도 상승은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이다. ‘교육은 시스템이 아니라 신뢰’다. 신뢰가 사라진 교육은 아무리 많은 제도와 기술이 있어도 서지 못한다.
이 위기는 단순히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미래세대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가치의 문제다. 회색 코뿔소는 예고 없이 달려들지 않는다. 문제는 그 존재를 알면서도 ‘곧 충돌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 안일함이다. 또한 회색 코뿔소는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교육이 다시 살아나려면, 그 위기를 보는 눈부터 열어야 한다.
정은혜 한국지역사회맞춤교육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