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태의 인생수업(16)]퇴직 후, 일이 있는 삶이 평화를 만든다
우리가 흔히 ‘좋은 삶’을 떠올릴 때, 많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편히 쉬는 모습을 그린다. 그러나 철학과 심리학은 오래전부터 경고해왔다. 쉼만으로는 인간이 결코 충만한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니체는 “인간은 목적 없는 삶을 견디지 못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의미 있는 일을 통해 세상과 연결될 때 비로소 평화를 얻는다. 일이 있어야 쉼이 빛나고, 평화에도 깊이가 생긴다.
퇴직 후 많은 이들이 느끼는 가장 큰 상실은 직장을 잃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하루를 채워주던 ‘일’이 사라졌다는 데 있다. 일이 없는 자리에 찾아오는 것은 공허와 무력감이다. 더 이상 사회에 필요하지 않다는 인식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실제로 여러 연구는 퇴직 이후 우울을 부르는 가장 큰 원인으로 ‘역할 상실’을 지적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기여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삶의 활력을 앗아가고, 신체 건강에도 악영향을 준다.
나 역시 퇴직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일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나를 지탱하는 정체성이 되었다. 과거처럼 모든 에너지를 일에 쏟지는 않는다. 대신 독서와 글쓰기를 병행하며 일과 쉼의 균형을 찾아가고 있다. 그 균형 속에서 삶은 소진이 아니라 성숙으로 나아간다.
전문가들은 정신적 건강의 핵심을 ‘유용감(有用感)’에서 찾는다. 내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혹은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은 곧 삶의 의미와 직결된다. 새로운 일이든 익숙한 일을 이어가는 것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기여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목표 없는 삶은 의욕을 잃게 하고, 결국 마음과 몸 모두를 병들게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고 세상에 보탬이 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그렇기에 ‘평생 현역’은 선택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조건이다. 우리는 생활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일해야 한다. 일은 곧 자신의 정체성이다. 블로거, 칼럼니스트, 에세이스트, 작가, 컨설턴트는 퇴직 후 내가 새롭게 만들어가는 또 다른 이름들이다.
퇴직 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성취가 아니다. 오늘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일을 마친 뒤 조용한 만족과 평화를 느끼는가, 그것이 더 중요하다. 노년의 행복은 ‘의미 있는 일’을 계속 이어가는 데서 온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정신적·신체적 건강의 비결이다.
나는 일을 통해 힘을 얻는다. 어제보다 나아진 자신을 발견할 때 뿌듯함과 행복을 느낀다. 퇴직 후 더욱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일이 우리를 지치게도 하지만 동시에 살아 있게도 한다는 사실이다. 쉼을 위해서라도, 평화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계속 일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내일도 또 두드릴 것이다. 그것이 평생 현역으로 살아가는 이유이며, 나를 지탱하는 삶의 방식이다. 좋은 삶이란 매일의 일과 기여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키워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진리는 퇴직 이후에야 비로소 더욱 선명해진다.
정안태 '오늘하루 행복수업' 저자·울산안전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