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시각]어린이 축제에 ‘정치적 의전’이 끼어들 때
결실의 계절 가을, 지역 곳곳에서 어린이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대회와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운동장, 체육관, 공연장마다 아이들의 설렘과 긴장감이 교차하고, 학부모들은 그 순간을 응원하며 함께 호흡한다. 그러나 이 따뜻한 장면들 속으로 어김없이 정치의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내년 지방선거가 반년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치인은 학부모 표심을 얻기 위해 다양한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정작 행사의 주인공인 어린이들이 뒷전으로 밀린다는 점이다.
최근 한 체육관에서 열린 태권도 품새대회에서도 비슷한 풍경이 반복됐다. 아침 일찍부터 들뜬 마음으로 경기장에 도착한 아이들은 그동안 연습한 동작을 선보이기 위해 긴장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회식은 내빈들의 늦은 도착으로 인해 30분 넘게 지체됐다. 행사가 공식적으로 시작하자 대회장에 들어가야 할 어린이들은 맨발로 종종거리며 2층 객석에서 1층 대기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내빈 소개, 축사, 기념촬영 등 길고 반복적인 인사말이 끝나기를 맨발로 기다린 것이다.
단상 위에서는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겠다” “아이들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약속이 가장 먼저 전해져야 할 대상인 어린이들은 그 말을 듣지도 못한 채 차가운 바닥 위에서 대기해야 했다. 부모들 역시 축사 내용이 아니라 ‘아이들이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하느냐’는 걱정과 불편함만 느꼈다. 정치적 메시지는 공허하게 흩어지고, 행사의 의미는 흐려진 순간이다.
한 정치인은 ‘전 ○○구청장’이라는 큼지막한 이름표를 달고 객석을 돌며 일일이 인사했다. 일부 학부모들은 “정말 아이들 보러 온 건지, 본인 홍보하러 온 건지 모르겠다”며 불편함을 내비쳤다.
또 다른 정치인은 마이크를 잡고 “본인이 예산을 편성해줘서 이런 대회를 열 수 있었다”는 식의 발언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학부모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예산 편성이나 승인 과정을 이해할 리 없다.
지방선거가 다가올수록 이런 장면은 더 자주 나타날 것이다. 아이들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다짐은 축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시간을 맞춰주고, 기다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실천에서 시작돼야 한다.
무대 위에서 선거를 말하기보다 무대 아래 아이 한 명의 발끝을 먼저 살폈다면 어땠을까. 축사를 듣게 될 이들의 입장을 조금만 헤아렸더라도 말 한마디의 진정성이 훨씬 더 깊게 전해졌을 것이다.
아이들은 정치인의 말보다 어른들의 행동을 더 정확히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표심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맨발로 서서 우리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다.
석현주 사회문화부 차장 hyunju021@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