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내의 초록지문(23)]떨켜
바람이 스친 자리마다 이파리를 떨구었다.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의 이별 의식 앞에서 괜스레 마음이 스산해진다. 이즈음이면 ‘떨켜’라는 단어에 오래 머무르게 된다.
나도 모르게 포근한 것들에 손이 간다. 두꺼운 옷을 꺼내 얇은 옷과 자리를 바꾸고 붕어빵 파는 곳을 검색한다. 집을 떠나 있는 아이의 안부를 떠올리며 커피를 내린다. 에어프라이어에 고구마를 굽는 동안 집 안 공기도 달라진다. 하나둘 계절이 달라지는 자리에 마음의 떨켜를 만드는 중인지도.
가을이면 나무는 잎이 머금었던 햇살과 모든 영양분을 품으로 거두고 경계를 만든다. 잎이나 꽃잎, 과실이 떨어질 때 생기는 세포층이 떨켜다. 수분 손실과 미생물이 침입하는 것을 막는 단단한 보호막이다. 겉으로는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지키는 일이다.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보며 생의 방식이 사람과 닮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름드리 아래서 어린 열매로 자란 아이들. 새것을 익히고 상처를 품기도 하며 성장했을 것이다. 떨켜는 폭풍우와 뜨거운 여름을 지나온 나무가 결실의 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한 보호막이다.
자연은 이별의 순간에도 완벽한 질서를 보여준다. 단절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예의이자 독립의 과정이다. 저토록 미련 없이 잎이나 열매가 스스로 떨어지도록 돕다니, 얼마나 깊은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일까. 잎은 다음 생을 위한 거름이 될 것이고, 꽃 진 자리에 맺은 열매는 다시 한 그루의 나무로 자랄 것이다. 어쩌면 부모의 사랑도 그런 모습일 것이다. 끝까지 붙잡기보다 떨켜를 만들어 아이 스스로 떨어져 나갈 수 있도록 기꺼이 길을 만들어주는.
내일은 수능이다. 거리마다 응원하는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독립을 준비하는 아이들과 미래를 기원하는 어른들의 마음이 겹친다. 노랗게 바닥을 물들인 잎들을 바라보며 아이들의 삶에 상처가 없기를, 상처를 통해 성장하는 삶이기를 함께 빈다.
색을 갈아입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에는 지난 계절과 다가올 계절이 담겨 있다. 바닥에는 내년을 준비하는 씨앗도 있다. 아이들의 삶은 그들에게 맡겨두고, 오늘의 기도를 내일의 기도로 이어갈 시간이다.
송시내 나무의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