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식상한 불행
어른의 눈과 아이의 눈은 다르다. 학급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나눌 때면 모두 같은 것으로 주문한다. 작은 무늬 하나와 색의 미묘한 차이도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게 있다. 번번이 취향 예측에 실패해 원성을 듣고 나서는 크리스마스엔 루돌프 카드, 독도의 날엔 강치 십자수처럼 무난한 기준을 택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다. 마음에 드는 모양의 돌멩이 하나만 주워도 괜스레 기분이 좋았던 어린 날을. 작은 하나하나가 참 별거였던 그때를.
어른의 마음과 아이의 마음은 닮았다. 양면 색종이를 받으면 두 면 중 하나만 마음에 들어도 충분했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것은 꽁하게 단념하던 시절처럼, 기대하며 무언가를 마중하고 곧 마주하는 이면을 이젠 제법 수용한다. 새로운 경험은 설렘과 불안을 함께 데려오고, 섬세함은 실수를 줄이지만 예민함을 높인다. 무던함은 편안함을 주지만 때때로 무관심까지 불러온다. 우리는 각자의 색종이에 없는 색과 무늬에서 신선함과 불안감을 느끼는 한편, 나와 비슷한 형태에선 안정감과 지루함을 느낀다. 선택에서 옳고 그른 무늬가 없듯, 나와 맞는 면을 뒤집어 찾을 뿐이다.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처럼 타인에게 쉽게 내보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미지의 세계를 꿈꾸듯 탐사의 욕구를 자극하는 달과 달리 인간의 이면은 종종 환영받지 못한다. 내밀한 사정을 꺼낼 적절한 거리, 시간, 분위기를 조율하기란 여간 쉽지 않고 아이들의 지우개 취향을 틀리듯 엇나가는 일이 많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다. 1959년 소련의 탐사선 ‘루나 3호’가 달의 뒷면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처럼, 수많은 가설과 불안을 걷어내고 마침내 진짜 모습을 비춰줄 누군가를 우리는 기다린다.
누군가는 내가 되기도, 네가 되기도 한다. 처음으로 달의 뒷면에 착륙한 ‘칭어 4호’처럼 누군가의 이면에 머무른 적이 있다. 그때 미숙한 신호를 보냈다. “많이 힘드셨죠?”. 답신이 왔다. “그 질문이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왠지 까마득하네요.” 어떻게 해석해도 일주일 전 종이에 베인 상처를 마주하듯 의연하고 개의치 않는 파동이 일었다. 몇 년 전 주고받은 통신이 오래도록 남은 이유는 행복을 좇는 사회에서 불행을 쫓은 태도를 보았기 때문일까. 세상에 이해받을 것 없이 그저 문제에 집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가치를 마주했다.
소설 ‘클라라와 태양’에서는 병에 걸린 딸 ‘조시’를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 로봇 ‘클라라’로 대체하려는 엄마의 계획이 차근차근 펼쳐진다. 불편하고 이물감 느껴지는 이야기를 따라 흘러가면 깊은 마음속 죽음마저 놓지 않으려는 부모의 희망이 일몰 전 마지막 빛을 발하는 태양처럼 마음을 물들인다. 공감하며 필사한 문장을 마지막으로 소개한다. “우리 중에 운이 좋은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거예요.(107쪽)” 현실은 어쩔 수 없다. “희망이란 게, 지겹게도 떨쳐 버려지질 않지.(325쪽)” 이 마음 또한 어쩔 수 없다.
배상아 울산 복산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