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곤의 살며 생각하며(66)]가을을 풍요롭게 하는 언어

2025-11-12     경상일보

점점 짧아져 가는 계절이지만 그래도 가을이 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혹독한 여름을 지나서 그런지 쾌적한 날씨가 고맙기도 하다. 고통에서 회복한 환자처럼 마음이 열리고 조금은 처연해지는 기분도 든다. 그래서 가을에는 소원했던 친구에게도 안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가수 김민기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돼 받아 주세요’라고 노래했다. 7080세대의 사람들에게 이 노래는 가을의 정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곡이다. 쓸쓸한 노래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감정은 쓸쓸함 만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열려야 가능한 일이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여행이라는 말도 가을에는 더욱 깊은 분위기와 정서를 자아낸다.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활동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여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계절에나 어울리는 여행이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여행의 목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은 가을이라고 생각한다. 가을이 되면 계절이 끝나기 전에 어디라도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하다못해 단풍놀이 여행이라도 가리라고 마음을 먹게 된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서 떠돌고 싶다는 생각도 가을이 되면 더 강해진다. 지난 여름의 힘든 시간에 대한 기억과 곧 다가올 추위에 대한 염려가 함께 만들어내는 휴식 같은 정서 때문일 것이다. 가을은 여름이나 겨울과 같이 참고 극복해야 하는 계절이 아니다. 강이나 산, 바다 어디에서나 가벼운 차림으로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집 밖을 나서는 일이 가장 가볍고 쉬운 계절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을이 되면 까닭 없이 입에 맴도는 시가 있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시인 김현승은 가을에는 겸허한 언어로 자신을 채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무성하던 잎이 낙엽이 돼 아래로 떨어지는 계절에는 우리의 마음도 낮은 곳으로 내려놓고 싶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읽은 시를 아직도 읊조리는 것은 드문 일이다. 기도라는 평범한 단어도 가을에는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발 더 나아가 가을에는 용서하는 힘을 얻는다고 고백하는 시인도 있다. 시인 나태주는 ‘가을 고백’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또 하나의 가을을 노래한다. “가을입니다. 잊지 못할 일을 잊게 하여 주옵시고, 용서하지 못한 것들을 용서하게 하여 주시고, 끝내 울게 하소서.” 용서라는 말과 어울리는 계절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고맙고 축복할 일이다. 용서하는 마음을 얻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누구나 안다.

사계절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도 소중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계절마다 새로운 정서와 새로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에 경험하는 결실과 풍요의 느낌은 완성이라는 정서와 연결돼 있다. 그리고 자신 속으로 침잠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부여한다. 그래서 ‘가을에는 홀로 있게 하소서’라고 시인들은 기도한다.

‘산길을 간다 말없이, 홀로 산길을 간다’. 가을 산길을 걷다가 저절로 흥얼거리게 되는 가곡이 있다는 것도 작은 행복이다. 갈 곳이 별로 없는 노인들에게 가을 산은 사색과 명상의 공간으로 그만이다. 나이가 들면 날씨에 점점 민감해진다. 그래서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산을 걷는 일은 손쉽게 누릴 수 있는 호사임이 분명하다.

나이가 들어 가면서 세상 풍파를 어느 정도 겪고 나면 터득하게 되는 지혜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보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는 일은 힘이 들어도 자연 속에 젖어 들기는 쉽다. 마음을 낮은 곳에 두기만 하면 가능한 일이다. 가을이 되면 이런 느낌이 더욱 절실해진다.

자연이 인간에게 가장 너그러워지는 계절이 점점 사라져 간다고 한다. 가을이 끝나기 전에 이 계절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는 곳으로 한번은 떠나야 할 것 같다.

김상곤 칼럼니스트·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