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지만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11월’ 속 한 구절이 유난히 마음에 머무는 계절이다. 해가 짧아지고, 바람이 한층 차가워질수록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선명해진다. 이 계절은 우리를 잠시 멈춰 세우곤 ‘잘해왔다고, 그때의 나에게 충분히 괜찮았다’고 다독인다. 지나온 열 달의 시간 속엔 후회도, 아쉬움도 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숨어 있다.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찾아내는 일, 그것이 11월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숙제인지도 모른다.
지난 4일은 점자의 날이었다. 만약 어느 날 세상이 어둠으로 덮인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당연하게 보고 있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도, 계절의 변화도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본다’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점자를 사용하는 분들은 손끝으로 세상을 읽고 그 손끝의 온기로 세상을 다시 써 내려간다. 몸은 불편하더라도 마음만은 초겨울 바람에 움츠러들지 않고 그분들의 세상이 따뜻한 온기로 채워지기를 소망한다.
그제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은 그들은 돌아갈 곳조차 없는 절벽 끝에서 조국을 향한 신념 하나로 버텼다. 그 희생은 시간으로도,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고귀한 기록이다. 이제 우리는 그 뜻을 잇는 세대다.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듯 각자의 자리에서 소임을 다하는 일. 그것이 오늘의 독립을 이어가는 또 다른 방식이다. 힘들고 팍팍한 시대지만 그래도 함께 연대하며 살아간다면 그 시절보다 조금은 더 나은 오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오늘 19일은 아동 학대 예방의 날이다. 아동이 겪은 학대는 시간이 희미하게 덮어주는 일이 없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깊은 뿌리를 내려 아이의 생애 전반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래서 눈빛 하나에도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내가 던진 말이 혹시 그 아이의 하루를 무겁게 만들진 않았을까.” 이 질문 하나가 아이들의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바꾼다. 돌아보기엔 늦은 것처럼 보여도 그때 하지 못했던 배려를 지금이라도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성장이고 회복이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 전하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그렇다. 아무것도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부족했던 시간도, 실패처럼 느껴졌던 날들도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소중한 과정이었음을 잊지 않길 바란다. 11월, 스스로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보자.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했어. 그리고 지금의 나는 여전히 잘하고 있어.” 그 말이 이 겨울의 첫 위로가 돼주길 바라며.
김강현 울산온라인학교 보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