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분옥 시조시인의 시조 美學과 절제](90)풍상이 섞어 진 날에-송순(1493~1583)
서릿발 속 피는 국화처럼 곧은 의리
풍상이 섞어진 날에 갓 핀 황국화를
금 분에 가득 담아 옥당(홍문관)에 보내오니
도리(桃梨)야 꽃인 양 마라 임의 뜻을 알겠다 <해동가요>
인생의 봄을 노래할 때나, 가을을 맞아 쓸쓸함을 읊을 때 미인을 옆에 두고자 하는 이 그 누구 없으랴. 옛날부터 요조한 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 했다. 도리(桃梨)와 같은 봄꽃은 교태 만면한 미인에 비유한다.
한번 웃으면 백 가지 교태가 드러나고, 또 한 번 보면 성城이 기울고 두 번 보고 나면 나라가 기운다고 했다. 봄날 미인의 자태는 가히 뇌쇄적이기도 하다.
아무렴 가을꽃 국화를 닮은 미인을 이를 때는 경국지색이다. 절세미인이다 하지 않는다. 그저 다가서기 어려운 여인이라고 이른다. 그렇다, 눈에 삼삼 귀에 쟁쟁 다시 돌아보고 싶은 여인의 모습을 가을 국화 같다고 하면 어떨지.
사람은 누구나 세월 가면 과일이 익어가듯 철들어 간다. 살아온 세월이 자양이 돼 어린이처럼 선한 눈빛으로 맑게 익어가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요요정정(妖妖貞靜), 섬섬옥수, 세만만(細彎彎)한 눈썹, 월태화용(月態花容), 흑진진한 머리, 그런 여인 아닐지라도 담장 아래 국화처럼, 산비탈에 핀 들국처럼 없는 듯, 피는 국화 같은 여인, 또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오래 기억하고 그리워한다.
명종 임금이 홍문관에 국화를 보내 놓고 이 꽃을 소재로 노래를 지어 바치라고 했으나 홍문관 관원들이 아무도 지어 올리지 못하자 송순에게 부탁해 지어 올렸더니 임금이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서릿발 속에 피는 국화를 봄에 피어 난분분한 도화와 배꽃에 비유해 임금의 뜻을 읽었으니 그 군(君)에 그 신(臣)이었다.
절조 없이 피는 꽃 아닌, 남녀 간의 정절만도 아닌, 군신(君臣) 사이의 충절을 기려 국화를 보내온 뜻을 알아차린 송순의 시조이다.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그리움도 받들어 모셔 온 스승에 대한 그리움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도도한 강물도 세월 따라 흐르고 남과 여, 군신 간의 의리도 흘러가는 세월이다. 구절초 마디마디 맺힌 충과 절을 마음으로 피우는 향기로운 계절이다.
한분옥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