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6장 / 불패의 달령 전투(83)
천동은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하직 인사를 올렸다. 천사장 이눌 장군은 그런 천동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 말이 맞다. 백정의 자식이었던 천동이만도 못한 자들이 조정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으니 나라가 이 모양이지. 하지만 천동아!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그것이 네가 명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다.’
며칠 뒤에 달령에 있었던 이눌 장군의 진영이 보이지 않았다. 반구정으로 진을 옮긴 것이다. 천동은 이눌 장군에게 일부러 못되게 군 것 때문에 며칠 동안 많이 괴로웠다. 존경해서 따르는 분이지만 그도 역시 양반 사대부라는 생각 때문에 심통을 부린 것이다. 그럴 때마다 천동은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자책을 하곤 했었다.
허울뿐인 양반인 그이기에 양반 사대부 출신의 이눌 장군은 이따금 천동에게 자격지심을 갖게 하는 존재가 되곤 하였다. 강목과 대식은 다시 송내마을로 돌아갔다.
보름 뒤에 무룡산에 눈이 내렸다. 겨울 동안 많아야 두세 번 오는 눈이 내린 것이다. 눈이 내리면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 잊고 싶었다. 나뭇가지마다 핀 설화가 너무 아름다워서 천동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무룡산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설국이다.
이 아름다운 정경에 몇 달 후면 다시 터질 전란도 잠시 잊고 싶어진다. 눈 덮인 무룡산이 보여주는 선의 아름다움이 고운 한복의 자태를 닮아있었다. 여백의 미로 마음을 아늑하게 해주는 한 폭의 동양화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천동은 이 신비로운 광경을 오래오래 기억하기 위해서 눈동자에 새겼다. 갑자기 날아오른 까투리가 설경에 미혹된 그의 정신을 돌려놓았다. 꿩을 쫓을까 생각하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살생을 하기 싫어서였다. 눈 덮인 하얀 산과 파란 동해바다의 조화가 다시 소년의 마음을 훔친다. 소년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는다. 잠시 멍한 눈으로 그렇게 있더니 이내 산등성이에 드러눕는다. 소년을 향해 달려들던 눈송이가 입속으로 들어간다. 한 시진을 그런 자세로 있자 소년은 없고 산의 일부가 되어버린 몇 가닥의 선이 생겨났다. 무룡산의 눈은 그렇게 세상을 품고 변화시켰다. 천동은 기다렸다. 화가가 그려놓은 멋진 작품을 자신이 망가트리기 싫어서 눈이 녹을 때까지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산을 내려가서 강목(부지깽이)과 대식(먹쇠)을 만나니 귀신을 보는 듯 그를 대했다. 산으로 올라가서 한 달은 연락도 없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니 그럴 만했다.
“뭐 하느라고 설도 안 쇠고 이제야 오는 겁니까?”
“설? 오늘이 며칠인데?”
“나흘 전이 설날이었어요. 다들 차례를 지낸다고 야단법석이었는데, 나리 없는 집이 얼마나 쓸쓸했는지 알아요? 사람 드는 것은 몰라도 나는 것은 금방 표가 난다고 하잖아요.”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