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성윤석 ‘문어(文魚)’
자신의 이름 앞에 글월 문 자를 붙여놓다니, 문어야말로 문학적 생선이로군. 생김새 자체가 글월처럼 무언가 말하려 하니까. 고작 몇 마리 새끼를 살리기 위해 6개월이나 10만 개의 알에다 산소를 넣어주고 지키다 죽다니, 문어야말로 가장 화학적인 생선이로군. 도깨비 화자였던가. 생이 죽음으로 화할 때, 화한다는 건 도깨비의 다리를 건너가는 것. 허물을 층층나무 4층에 벗어두고 간 매미는 어디로 갔을까. 살아 있으되, 살아 있을까, 갸우뚱거리는 날들에 질주할 수 있는 오토바이와 바다를 곁에 두고 고무대야에서 철퍼덕 탈출에 성공한 저 문어 바라보는데 폐암 말기인지도 모르고 글월 문 자 그대로, 어시장 50년 여장부인 그대로 새벽 수협공판장에서 쇠수레를 짚고 서 있는 안화점 여사
죽음과 공존하는 고단한 삶
우스갯소리로 가장 많이 배운 생선을 고등어라고 하는데, 고등어보다 한 수 위가 문어인 것 같다. 문어는 이름부터 어엿하게 글깨나 읽은 식자층임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글이야말로 삶의 서사를 풀어가는 중요 수단이다.
게다가 문어는 생명을 걸고 새끼를 지키다 죽어가는 지고지순한 모성애를 보여준다. 시인은 이러한 문어를 ‘화학적인 생선’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생체활동의 화학적 반응뿐 아니라, 삶에서 죽음으로 화(化)하는 것이, 화학 반응으로 물질의 성질이 달라지듯 원초적으로 변화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도깨비 다리를 건너듯 신비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마치 허물을 벗어두고 간 매미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는 이제 시인 자신으로 향한다. 나는 살아 있되,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일까, 하는 근원적인 물음. 무기력한 자신과는 달리 문어는 온 힘을 다해 살려고 바둥거리는데.
그리고 이처럼 생의 의지를 보이는 문어의 모습에서 몸속에 죽음이 자리 잡은 줄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체하며 억척스럽게 살고 있는 한 여인을 떠올린다. 다시, 문어다. 저 글월로 고단한 생의 서사를 풀어가는.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