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알프스에 얽힌 이야기]하늘마저 끌어내릴 듯한 산정무한…용솟음치는 암괴 절경

2025-11-24     차형석 기자

35번 국도를 타고 통도사 쪽을 향해 가다 보면 한때 통도사의 영화가 어디까지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나온다. 보물 제74호로 지정된 ‘국장생석표’(양산시 하북면 백록리)다. 통도사가 그 옛날 차지한 땅 넓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경계석이기도 하고, 사방에서 내습해오는 액을 막고 허한 곳에 기운을 보충하려고 세운 풍수상 석표이기도 하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영축산 아랫마을 지산리엔 ‘팔도승지금지석’이란 돌을 세워 놓았는데, 이것은 통도사와 영축산 기를 함부로 훼손하지 말 것을 표시한 돌로써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면 안 되고, 특히 묘를 쓰지 말 것을 팔도에 모인 승들이 모여 경고를 표시한 표식이다.

지산리는 영축산과 통도사로 들어오는 주맥(입수맥)을 관장하는 마을로 아주 중요하게 여겼음에도 이쪽에 들어서면 어딘가 모르게 대사찰 통도사와 분리된 묘한 인상을 받는다. 옛날부터 당이 있었다고 하여 ‘당앞에’ 마을로 불렸다는 ‘서리’(西里)를 통해 들어가면 지산리와 평산리로 마을이 나뉘고 ‘모단골’로 불린 ‘지내리’(池內里)는 먼발치에서 이 두 마을을 지켜보고 있다. 가만히 보면 영축산 기가 각기 하북면 이 세 마을 쪽으로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지산리(芝山里)는 진시황이 이곳에서 불로초인 영지(靈芝)를 얻었다 해서 붙여진 유래 하나와 땔감으로 쓸 나무는 없고 죄다 풀만 있다고 해서 이름이 만들어졌다는 또 하나의 설이 있다. 반면 그 아래 초산리(草山里)는 소 먹일 풀이 없다 해서 지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지산과 이웃한 평산의 원래 이름은 ‘부두골’(부도골)이었고, 한참 옛날 절간 밖을 나온 스님들이 살림을 차려 생활 터전을 일군 ‘중마실’에서 스님들이 죽자 부도탑을 세운 것이 계기가 돼서 ‘부두골’로 불리게 됐다는 이 마을 토박이 지한영(58)씨의 말이다. 그 부도탑은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 옆으로 옮겨 놓았다.

지산마을 축서암에서 시작한 영축산행이다. 하늘로 우뚝 솟은 헌걸찬 소나무의 영접을 받으며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가을을 저만치 벗어던져 만든 덤부렁듬쑥한 숲길이 찹찹한 그늘막을 만들었고 적당히 푹신한 산길을 걷는 다리는 신이 났다. 뱀처럼 서린 임도 길을 버리고 급하게 가풀막진 길을 택해 오르니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아직 이울지 않은 꽃에 한숨 덜고 이윽고 닿은 곳이 취서산장이다. 그러나 없다. 좌우로 양산 지산리, 지내리, 울산 방기리로 가야 할 푯말만 애처롭게 서 있고 전선용 원탁만 창공 아래 정족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미 직에서 물러난 한 정치인이 다녀간 이후로 취서산장이 몸살을 앓았다. 산꼬대를 막아주고 따뜻한 라면 한 그릇으로 산객들이 정을 나누던 곳이 사라졌다. 아마 두 번 다시 지을 일은 없으리라. 인간 심사가 고약해서도 이 터가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다.

이곳에선 통도사도 숲에 뒤덮여 잘 보이지 않는다. 다락논과 저수지가 그나마 눈에 들어오고 한 눈에도 알아볼 만한 골프장 서너 군데가 눈에 띈다. 듬성듬성 솟아 난 바위에 정상이 멀지 않았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거대한 바위 산채가 시선을 압도한다. 일명 독수리 바위다. 독수리가 큰 날개로 활갯짓하며 당장이라도 바위를 차고 오를 것 같다. 신령스러움마저 든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선 제우스의 대리자이자 예언자, 형벌 집행자로. 아메리카 원주민에겐 인간과 신을 매개하는 역할로 상징되는 독수리가 이 산에 웅거했을 땐 독수리에 관련된 전설이 있을 성싶은데, 없다. 다만 이곳 빨치산 출신으로 용케 살아남은 구연철 옹을 통해서 현대사를 잠시 들었을 뿐이다. 사령관(당시 하준수 ‘남도부’)이 국군의 동계 공략으로 신불산 고지를 빼앗기자 영축산으로 사령부를 옮겼다는 말에서 영축산도 신불산 못잖은 한 가닥 이야기를 숨겨놓은 곳이다. 빨치산이라 불렸던 그들은 아주 먼 옛날 선악으로 구분 지은 신파극 속 악인이 아니라 대규모로 조직된 인력과 고도화된 병기에 의해 죽어가야 했던 역사 속 슬픈 엑스트라였다.

그들은 영축산 ‘단조산성’이 적 만명을 감당해낼 만큼 요새였다는 먼 옛날 얘기를 믿고 야음을 틈타 이곳으로 왔을 것이고, 그 이후 함부로 입에 올리기 꺼리는 자들로부터는 연민의 대상이요, 가족이 해를 입은 자들에겐 증오의 대상이 됐다. 상처가 아물 때쯤이면 이곳 어디쯤인가에서 얘기 한 토막으로 사람들 입을 통해 전해질 것이다.

하늘을 멀리 두었지만, 장중하게 버틴 산정은 하늘마저 끌어 내릴 것 같다. 바위너설과 옹두라지를 타고 정상에 이르니 산정무한이 따로 있지 않다. 천하가경이다. 너럭바위를 껑충 뛰어 이 바위에 올라서고 돌 사닥다리를 훌쩍 뛰어 저 바위에 서고,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린 암괴를 보며 감탄해 마지않다가 흰 구름이 드리운 공한 하늘 아래 쭈뼛쭈뼛 선 바위의 솟구침이 장쾌해 흥이 절로 이는데, 보는 이 없다면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다.

자장율사가 이 산을 인도 영축산과 똑같이 부른 이유를 이제야 알만하다. 다만 산의 연원을 캐물을 때 이 산이 품고 있는 통도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산의 기운이 인도의 땅과 통한다’에서 통도사란 이름이 지어진 만큼 영축산도 석가모니가 고대 인도 마갈타국 동북쪽에 있는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강(講)했다는 유래를 들어 ‘양산시지명위원회’가 영축산이란 이름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영취산이란 산명이 산형(山形)을 보고 산관(山觀)으로 지었다면, 영축산은 부처님을 받든다는 불교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산 이름이다.

하산길은 백운암 쪽으로 잡았다. 보기보다는 꽤 험한 길이면서 곳곳에 펼쳐진 바위들의 자태는 험한 만큼 따로 감상할 여유도 준다. 무척 가파른 길과 계단을 타고 내려서니 백운암이다. 수많은 통도사 암자 중에서 유일하게 차량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다. 오로지 수행하는 자세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올라와야 하는 곳이기에 사람 왕래는 뜸한 편이다. 겉보기엔 평범한 암자 같지만, 근대 선의 시조라 불리는 경허와 그의 제자 만공 그리고 경봉 스님이 한때 수도했던 곳이며 만공스님이 처음 깨달았던 곳이기도 하다.

백운암을 거쳐 극락암에 잠시 발길을 놓으니 절창에 가까운 극락암 스님의 독경 소리가 산사에 가득하다. 그걸 뒤로하고 머리를 들어 지나왔던 영축산을 돌아보니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고 이곳을 찾아 불법을 세운 자장의 뜻이 헤아려진다.

글·사진=백승휘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