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영원회귀(永遠回歸)와 운명
밤이 깊어 질수록 거리는 낯설게 다가온다. 혼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고독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와 같다. 멀어져 간 인연, 과거의 선택, 얼룩진 상처, 잊고 싶은 순간들, 간직하고 싶은 추억 등 모든 것이 하나의 생각으로 수렴된다. “만약 이 삶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다시 반복된다면, 나는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프리드리히 니체는 바로 이 질문을 우리 앞에 놓는다. 그는 《즐거운 학문》 제34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악령이 너에게 와서, 지금 이 삶을, 너의 모든 순간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하고 거듭된 삶에 새로운 것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면, 넌 그것을 저주하겠는가? 아니면 축복하겠는가?” 그는 이 사상을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 불렀다. 이러한 철학적 상상은 단순한 형이상학의 놀이가 아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태도를 점검하는 도덕적 심문이다. 니체는 “영원회귀”라는 이름으로 인간 실존의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한 번뿐인 삶도 버겁다. 무한히 되풀이되는 삶에서도 당당히 “나는 괜찮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영원회귀(Ewige Wiederkunft)’는 어떤 삶의 상황이 중복된다는 양적 순환이 아니다. 니체가 말한 것은 질적인 조언, 즉 같은 삶을 다시 살아도 좋다고 여길 만큼의 전면적인 긍정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을 절대적 의미로 만드는 가설이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이 삶이, 당신의 가장 후회되는 장면까지도 똑같이 재연된다면, 당신은 그 삶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이것은 회피의 철학이 아니라 결단의 철학이다. 니체의 이 물음은 삶의 도피본능을 뿌리부터 흔든다. 우리는 대부분 과거를 지우고 싶어 한다. 잘못된 말, 서툰 사랑, 놓쳐버린 시간 등 하지만 니체는 정반대로 요구한다. 모든 것들이 중복되기를 원할 만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긍정의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철학을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로 정리한다. 단지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수동적 체념이 아니라, 그 속에 자신의 의지를 투사하고, 삶을 창조적으로 이끄는 적극적인 자세를 말한다. “나는 내가 살아온 인생을 다시 살아도 좋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며, 원할 것이다.”이 말을 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더 이상 외부의 우연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다. 삶의 무게를 견디는 자가 아니라 그 무게를 자신의 의미로 전환하는 창조자 적 입장이다.
니체는 고통 없는 삶은 공허하다고 본다. 그에게 고통은 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다.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 존재의 가속장치다. 이 철학은 우리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권태, 불안, 선택의 피로 등 그 속에서도 “나는 이 하루를 다시 살아도 좋다”고 말할 수 있는지. 니체의 물음은 우리에게 되묻는다.
“당신은 지금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자유는 무엇일까? 그는 자유를 ‘운명에서 벗어나는 능력’이라기 보다는 운명을 껴안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으로 본다. 삶을 선택하고 운명과 마주할 때 그것을 책임지고 사랑해야 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 성격을 지닌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주체적 인간이다. 외부의 힘에 밀려 살아가는 객체가 아니다. 창조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철학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의미의 위기’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고, 삶의 서사가 단절되고, 선택은 넘쳐나지만 정작 나의 삶은 누구의 것인가 하는 자각은 사라지고 있다.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확실한 운명을 마주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대신 좋아하고 긍정함으로써 강하고 개척적인 삶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사실상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현재를 절대적으로 살아가라는 윤리적 요청이다. 정해진 길은 없다. 그러나 걸어온 발자취는 남는다. 니체는 부드럽게 그리고 단호하게 속삭인다. “발자취를 돌아보라. 그것이 너의 삶이며 너의 운명이다.”
김진 김진명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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