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울산전란사(16)]고려말 왜구의 침입과 울산읍성·언양읍성
왜구의 침입이 가장 심했던 때는 고려 말~조선 초였다. 왜구의 침입이 가장 빈번했던 때는 고려 우왕 때이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의 기록에 따르면, 우왕 2년(1376) 11월1일에 양주(양산)·언양·기장·고성 등지를, 같은 해 11월5일에 울주·회원(마산)·의창(창원) 등지를 왜구들이 쳐들어와 민가를 불사르고 노략질해 남은 것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또 12월에는 다시 양주와 울주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주민을 도륙하고 달아났다. 이듬해 4월 왜구가 황산강(黃山江, 낙동강)으로 침입해 울주·양주·밀성(밀양)·계림(경주) 등지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노략질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 해 또 왜구들이 언양현에 쳐들어왔다”라고 했다. 우왕 5년(1379) 윤 5월 울주에 왜구들이 쳐들어왔고, 6월에 울주·청도·밀성·자인·언양 등지에 쳐들어왔다. 같은 해 7월에 왜구들이 울주에 쳐들어왔는데, 이들은 벼와 기장을 마구 거둬 저들의 군량으로 삼았다.
빈번한 왜구의 침입으로 한반도의 남동해안은 백성이 살기가 거의 힘든 곳이 됐다. 울산과 언양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한반도 남동해안의 방어는 고려 조정의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는데, 이 과정에서 울산지역에 새로운 읍성이 탄생했으니 바로 울주 고읍성(古邑城)이다. 신라 말 학성산에 있던 계변성은 ‘신학성’과 ‘학성’으로 이름을 바꿔 가며 사용됐고, 고려시대에도 울산의 행정 성곽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이 극에 달하자 신학성을 포함한 태화강 하구 일원에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 됐는데, 1362년(공민왕 10) 8월에 왜구가 동래와 울주를 불태우고 조운선을 탈취한 사건과 1379년에 왜구의 침탈을 견디다 못한 울주 고을의 수령이 경주로 대피한 일은 고려 정부로 하여금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 무렵 성균사예 이문화(李文和)가 계변성에 제사를 지내러 왔다가 어린 시절 겪었던 울주와 다른 모습을 보고 축성의 필요를 절감했다. 이에 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22권, 경상도 울산군, ‘고적’에 전한다. 당시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울산지역의 참상과 이에 따른 이문화의 소회가 잘 나타나 있다.
‘(전략)...경인년 이후로 왜적의 난리가 없는 해가 없으므로, 백성 중에 항산(恒産)이 없는 자는 다른 데로 가버리고, 부자로 사는 백성들은 이를 엿보아 구차히 편안하게 있다가, 여러 번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가서 아무것도 없이 된 연후에야 돌아가야 할 곳을 알게 된다. 기미년에 이르러 왜적의 침입이 더욱 심해지자, 울주에는 백성들이 하나도 남지 않을 지경이 됐다. 그 뒤 울주의 지주(知州)가 된 자가 관인(官印)을 가지고 아전 몇 식구를 모아서 계림성(경주)에 와서 살았다. 갑자년 가을에 성균사예(成均司藝) 이문화(李文和)가 경상도를 염문(廉問, 사정(事情)이나 형편(形便) 따위를 몰래 물어봄)했을 때...(중략)...내가 어릴 때 아버님이 울주(蔚州)를 다스릴 때 따라와서 봤을 때는 울주가 번화하고 공고하며 웅장했었는데, 지금 와서는 쓸쓸하기가 이와 같다.’ 하고…(후략)
이문화(李文和, 1358~1414)는 1380년(우왕 6) 문과에 장원 급제했다. 우정언, 우헌납, 예문응교를 거쳐 울산을 관할 범위에 포함하는 경상도 안렴사를 지냈으며, 공양왕(恭讓王) 때는 우사의(右司儀)를 역임했다. 성균관사예로 재임하던 이문화는 1384년(우왕 10) 울산에 내려왔는데, 당시에 계림부윤 박위(朴葳)와 울주 지역의 번성과 방위에 관해 의견을 나눈 사실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울산군 고적조에 수록된 이첨(李詹)의 ‘고읍성기(古邑城記)’에 전한다. 이에 따르면 영남의 여러 지역을 관할한 경험이 있고 김해에서는 분산성을 축성한 바 있는 박위의 도움을 받아서 이문화가 울산의 고읍성을 쌓는 역(役)을 시작했고, 이후 지울주사 김급이 이를 지원해 읍성이 건립됐다.
울산읍성이 축성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이때부터는 황무지로 변한 땅을 다시 개간하는 일을 계속했다. 1476년 조선 성종 7년에 병조판서 이극배의 보고로 울산읍성은 다시 축조돼, 이듬해 1477년 10월에 완성됐다. 당시 성곽의 위치는 현재의 함월산 남쪽인 중구 북정동, 교동, 성남동, 옥교동에 걸쳐 있는 큰 성이었다. 읍성의 규모는 <성종실록>에 높이 15척(약 4.5m), 둘레는 3639척(약 1103m)으로 기록돼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이 울산읍성을 허물면서 사라져 버렸으며, 그 후 성의 복원을 보지 못하고 무성곽의 고을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동헌 일원을 제외하고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는 왜구의 침입에 피폐해진 언양에도 읍성이 축성됐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따르면, 언양읍성은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토성으로서 최초로 축조됐다. 조선 성종 12년(1481년)에 쓰인 <동국여지승람>에도 여전히 언양읍성이 토성으로 기록돼 있으며, 그 규모는 둘레가 1489척, 높이가 8척, 우물 2개이다. 석성(石城)으로 개축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증보문헌비고>에 있는데, 1500년(연산군 6)에 현감 이담룡(李聃龍)이 석성으로 개축했으며, 당시 둘레 3064척, 높이 13척이었다. 또한, 첩(堞)이 834개소이고 성안에는 우물이 4곳 있었다. 이후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김용한(1738~1806)의 ‘차문소루중수운(次南樓重修韻)’에 언양읍성의 남문인 진남루가 중수된 것으로 나타나고, 월하(1773~1850)의 <가산집(伽山集)>의 ‘근차영화루중판운(謹次映花樓重板韻)’ ‘근차진남루중수운(謹次鎭南樓重修韻)’에서 진남루를 고쳐 영화루라 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언양읍지> 관액조에 “영화루는 진남문인데 객관 앞에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