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몸 된 은행달력, 노년층 수소문 행렬
2025-12-10 김은정 기자
9일 본보 취재를 종합하면, 이달 초 북구의 한 은행 앞에는 영업시간 전부터 20여명의 노인들이 줄을 섰다. 해당 지점이 내년도 달력을 처음 배부하는 날이라는 소식이 퍼지자 이른바 오픈런 행렬이 이어진 것이다.
이날 줄을 서 달력을 받았다는 70대 정모씨는 “예전엔 지나다 그냥 받기도 했는데, 요즘은 줄을 서지 않으면 달력을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며 “새해를 시작하려면 새 달력이 꼭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금융권과 기업의 달력 제작 축소는 최근 특히 두드러진다. 농협 울산본부는 올해 발주량을 전년 대비 약 30% 줄였다. 농협 관계자는 “과거 영업용으로 대량 제작하던 관행을 예산 효율화 차원에서 조정했다”며 “현재는 방문 고객 중심으로 배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보험사 역시 직원들에게 일괄 지급하던 달력 수량을 크게 줄이고 올해는 필요한 인원만 신청해 받을 수 있도록 지침을 바꿨다.
이 같은 변화는 단순한 비용 절감만의 문제는 아니다. 종이 인쇄물 감축 요구, ESG 경영 확산, 홍보 방식의 디지털 전환 등이 겹치며 달력 제작이 ‘선택 경비’로 분류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 제작량이 줄어들면서 과거처럼 시장·상가·경로당 등에 넉넉하게 배부되던 달력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달력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온라인 중고거래 사이트에는 ‘내년 달력 구합니다’ ‘은행 달력 삽니다’ 등 글이 잇따르고 있다. 일부는 5000원에서 1만원까지 거래되며 연말 ‘품귀 품목’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중고거래 플랫폼을 익숙하게 다루기 어려운 고령층에게는 실질적인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달력을 받지 못한 고령층 일부는 여러 은행과 기관을 직접 돌며 ‘남는 달력이 있는지’를 묻고 있고 경로당에서도 ‘올해는 별도 배부가 없다’는 안내가 늘고 있다. 또 일부 노인들은 ‘은행에 갔더니 통장을 가져와야 달력을 준다고 해서 다시 집에 다녀왔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지역 한 노인복지 관계자는 “디지털 일정 관리가 보편화되면서 종이달력 제작이 줄어드는 흐름은 자연스럽지만, 노인들은 큰 글씨로 한눈에 볼 수 있는 종이달력을 여전히 생활 필수품처럼 사용하고 있다”며 “대체할 만한 수단이 아직 마땅치 않아 연말이 되면 부족한 달력을 찾는 분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은정기자 k2129173@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