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올해의 나는 성적표가 아니라, 조용히 빛나는 이야기였다
한 해를 돌아본다. 잘한 일과 잘못한 일, 남긴 것과 놓친 것, 기쁨과 아쉬움을 조심스레 저울질한다. 한 해를 성적표처럼 계산해보려는 오래된 습관이다. 하지만 마음은 숫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나온 365일은 흑백의 평가표가 아니라 스토리이다. 살아낸 날들의 결이다. 때로는 빛났고, 때로는 흔들렸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멍하니 앉아 있던 시간. 이 모든 날이 모여 서사가 되었다. 뜻대로 풀리지 않았던 순간도, 서운하고 외롭던 밤도, 소중하고 기쁜 하루도 모두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스토리였다.
길이 얼어붙고 아늑한 아랫목이 그리운 연말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어떤 꿈을 품고 있었지?” “올해의 나는 무엇에 웃고, 무엇에서 상처받았을까?” “어떤 순간에 가장 행복했고 매순간 과연 나다웠는가?” 이 질문을 하며 내 마음의 집, ‘스토리하우스’를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책상 위에 쌓인 파일을 정리하듯, 한 해의 감정들을 차분히 꺼내 바라보는 과정이다.
우리는 늘 목표를 세우며 살아간다. 한 해의 끝자락은 목표를 이루었는지 여부보다 그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돌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힘들어도 버텼던 날, 잠시 주저앉았던 날,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던 날, 이 모든 날이 올해의 우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연말은 평가가 아니라 다독임의 시간이다. 누구도 모르는 작은 용기들, 마음속에서 조용히 흘렸던 눈물, 혼자서 치른 싸움들을 스스로 인정해주는 계절이다. 세상은 성취를 보겠지만, 우리는 자신이 살아낸 마음을 안다. 그 마음을 쓰다듬어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올해를 잘 살아왔다는 증거다.
진료실에서 만난 사람들의 한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잘 모르겠어요, 그냥 힘들었어요”라고 말하던 이들의 표정 속에도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다. 겉으로는 실패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하루를 버틴 용기,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던 아픔, 흔들리면서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는 마음의 의지가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닫곤 한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누구도 모르는 계절과 풍경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결국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AI 시대가 모든 풍경을 바꾸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기 마음을 바라보는 노력이다. AI는 정보를 처리하지만, 마음의 결을 읽어주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내담자들에게 ‘올해의 스토리하우스’를 함께 만들어보자고 제안한다. 비록 서툴렀지만 끝까지 해낸 일, 그냥 눈물이 흘러버렸던 저녁, 아무것도 하지 못해 가만히 자신을 내버려두었던 날, 아주 작은 기쁨 하나가 마음을 환하게 했던 순간, 이런 조각들이 모이면 마음은 다시 제자리를 찾고, 내년을 살아갈 힘도 자연스럽게 자란다.
우리가 평소 기록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든 메모장과 일기장을 정리하며 한 해의 자신의 스토리를 다듬어 보자. 수많은 마음의 흔들림을 복기하는 일이다. 그 흔들림 속에 깃든 삶의 용기를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올해의 나’를 완성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토리하우스는 평가의 공간이 아니라 아지트 같은 공간이다. 연탄 아랫목처럼 따뜻하게 나를 품어주는 마음의 거처다. 고통으로 마음이 시릴수록, AI가 세상을 정교하게 계산할수록, 우리는 더 따뜻한 마음의 방을 마련해야 한다. 그 방에서 나를 바라보고, 나를 꺼내 읽고, 나를 다시 이어가는 힘을 얻어야 한다.
연말은 나를 위한 가장 소중한 기회다. 내가 걸어온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며, 내 마음의 결을 알아가는 시간이다. 세상으로 달리던 내가 잠시 멈춰, 내 안을 들여다보는 기회이다. 이 시간을 사랑할 수 있다면 내년의 나는 더 단단하고,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공간, 우리의 스토리하우스가 내년에 더 밝게 빛나기를 조용히 기원한다.
한치호 마인드닥터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