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열의 고용노동이슈(32)]세대 갈등 아닌 고용과 함께 성장 필요한 시기
최근 정부의 고용정책 기조는 직접적인 일자리 창출은 시장에 상당 부분 맡기고, 대신 근로시간·임금·노사관계 등 노동제도 이슈에 정책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방향으로 읽힌다. 탄력근로제, 선택근로제, 임금체계 개편, 노사관계 제도 개선과 같은 의제가 전면에 오르고, 정작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 일자리 생태계를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모습이다.
국정과제 목록에서도 일자리 창출 프로그램은 눈에 띄게 줄고, 대신 정년연장과 취약계층 보호, 노동시장 구조개선 과제가 전면에 배치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인구감소와 AI 전환, 지역소멸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고용정책의 전면에서 일자리 아젠다가 비켜서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과거처럼 재정을 동원해 단기 일자리를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좋은 일자리’인지에 대한 기준을 분명히 다시 세우고 그 비중을 체계적으로 키워가는 일이다.
좋은 일자리의 핵심 기준은 분명하다. 첫째,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간의 과도한 임금·복지 격차를 완화하는 것이다.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현실의 임금 테이블 속에서 조금이라도 구현되도록 만드는 작업이 여기에 포함된다. 둘째, 여성·청년·고령자 등 다양한 계층이 각자의 직무 역량에 맞춰 노동시장에 재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넓히는 것이다. 돌봄·학업·조기퇴직 등으로 한 번 시장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어야 한다. 일자리 정책의 초점을 ‘얼마나 많이’에서 ‘얼마나 괜찮은가’로 옮기는 순간, 고용정책은 복지정책과 성장전략을 동시에 견인하는 사회적 인프라가 된다. 양극화 완화와 생산성 제고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풀어낼 수 있는 지렛대가 바로 좋은 일자리다.
그러나 현실에서 가장 약한 고리는 중장년의 디지털 직무 전환이다. 각종 조사에서 전환을 희망한다고 답한 비율에 비해 실제 전환 성공률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공급자 중심, 이론 위주, 수도권 편중의 교육체계 속에서 새로운 코딩 문법을 설명하는 강의실은 넘쳐나지만, 수료 후 어떤 직무로, 어떤 기업에서, 어떤 형태로 일하게 될지에 대한 설계는 여전히 빈칸으로 남아 있다.
지역의 중소·중견기업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직무, 현장에서 요구되는 디지털 업무의 내용은 커리큘럼 설계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다. NCS기반 훈련체계의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기업참여형 훈련, 수료·채용 연계, 지역 기반 인프라 같은 실행 메커니즘은 구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다른 길을 이미 걸어가고 있다. IBM의 스킬즈빌드(SkillsBuild)처럼 기업이 교육 콘텐츠 설계와 채용을 함께 책임지거나, 독일 지멘스처럼 현장 프로젝트에 참여한 교육생을 곧바로 채용 풀로 관리하는 모델이 대표적이다. 교육기관은 기본역량을 기르고, 기업은 실무 프로젝트를 제공하며, 지역은 주거·생활 인프라를 뒷받침하는 삼각 구조가 짜여 있다. 교육·채용·경력개발을 하나의 패키지로 엮는 구조를 한국의 직업훈련에도 본격적으로 이식해야 중장년의 재도전이 ‘또 하나의 수료증’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아가 이러한 모델을 청년, 경력단절 여성, 이주민 등으로 확장해 생애 전 주기 직무 전환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산업 측면의 과제도 분명하다. 전환산업, 중소기업, 서비스업을 ‘나쁜 일자리의 집합소’가 아니라 좋은 일자리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석탄, 내연기관차 협력업체 등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업종을 AI·그린 전환 특구, 전환산업 플랫폼과 연결해 신성장 서비스·제조 부문으로 이동시키고, 여기에 납품단가 연동제, 정책금융, 직무·임금체계 컨설팅을 결합해야 한다. 산업정책과 고용정책, 지역정책을 따로 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로 통합해야 전환의 고통을 줄이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야 열악한 조건의 비정규·하청 일자리가 세대를 건너 반복 생산되는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정년연장 논의도 이 큰 그림 속에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정년연장은 어디까지나 고령자 고용연장 정책이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정책이 아니다.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일자리에 머무는 기간을 늘려주는 성격이 강한 만큼, 청년·비정규직에게 돌아갈 좋은 일자리의 총량을 늘리는 효과는 제한적이다. 문제의 핵심은 ‘고령자와 청년 중 누가 더 가져가느냐’가 아니라, 양질의 일자리가 대기업·정규직에 집중된 이중구조 그 자체다. 이 구조를 건드리지 못하면 정년연장은 청년의 박탈감만 키울 수 있다. 세대 갈등만 키우고 구조 개편은 미루는 결과를 낳을 위험도 있다.
따라서 정년연장은 반드시 직무·임금·전환 패키지와 결합해야 한다. 연공 중심 임금체계를 완화하고 직무·역할·성과 기반 임금체계로 개편해 고령자의 장기 재직이 기업에 단순한 비용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세대 간 직무 재배치를 통해 고령자는 후배 육성과 지식 전수, 난이도 높은 핵심 직무에 집중하고, 청년에게는 디지털·R&D·새 프로젝트를 우선 배정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년 이후 구간에는 파트타임, 프로젝트 계약, 창업·사회공헌과 연계된 전환형 제도를 도입해 자리를 지키는 연장이 아니라 역할을 바꾸는 연장으로 설계해야 한다. 고령자의 숙련을 살리면서도 청년에게는 도전의 공간을 열어주는 이중 설계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정년연장, 취약노동자 소득보장,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혁신적 일자리 정책은 하나의 일자리 정책 믹스로 재구성돼야 한다. 고령자 고용을 연장하는 기업에 청년·비정규직 정규직 전환과 신규 채용을 일정 비율 이상 연계하고, 중소기업에는 납품단가와 금융·조달 인센티브를 통해 좋은 일자리를 제공할 여력을 키워주는 방식이다. 여기에 지역·산업별 AI·그린 전환 프로젝트형 일자리와 디지털 서비스 일자리를 결합하면, 일자리의 양과 질을 함께 높이는 ‘고용과 함께 하는 성장’의 경로가 현실적인 정책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다. 세대와 계층, 지역을 아우르는 좋은 일자리 전략이야말로 저성장과 불평등의 악순환을 끊고 한국경제의 다음 단계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노동제도 개혁을 넘어 일자리 구조를 바꾸는 정책변화가 필요하다.
윤동열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한국생산성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