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미 정부가 ‘백기사’? 고려아연, M&A 위협 해소되나

2025-12-16     김창식
상시적인 적대적 M&A 압박 속에서 고려아연이 또 하나의 경영권 방어 카드를 꺼냈다. 미국 정부가 참여하는 합작법인(JV)을 설립해 미 남동부에 약 10조원을 투자, 울산 온산제련소와 동일 수준의 ‘쌍둥이 제련소’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이다. 단순한 해외 생산기지 확장을 넘어,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국제 질서 속에서 전략 광물 공급망의 핵심 거점을 선점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고려아연은 15일 이사회를 열고 남동부 전략광물 제련소 건립 안건을 의결했다. 아울러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통해 약 2조8510억원 규모의 타법인 증권 취득 자금 조달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 유상증자에는 미국 국방부와 상무부, 방산 전략기업 등이 미 현지법인을 통해 참여한다. 형식상 민간기업의 해외 투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정부가 필요로 하는 전략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는 사업이다. 고려아연이 미 국가 안보와 산업 전략 차원에서 평가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전략적 선택의 배경에는 고려아연의 불안정한 지배구조가 자리한다. 현재 지분은 영풍·MBK 연합 44.24%, 최윤범 회장 측과 우호 지분 약 32%로, 지난 3월 정기주총에서 최 회장 측이 상호주 의결권 제한 규정을 활용해 이사회 장악을 막아냈지만, 구조적 열세는 여전하다. 바로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미 제련소 건립이 경영권 방어의 ‘신의 한 수’로 평가받는 것이다.

IB 업계는 이번 유상증자가 성사되면, 최 회장 측과 적대적 주주 간 지분 격차가 사실상 사라지며, 경영권 위협과 M&A 압박이 크게 완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신주 발행 후에는 초박빙 구도가 형성돼, 2026년 정기주총을 포함한 향후 표 대결에서도 영풍·MBK 연합이 이사회를 장악하기는 어려워진다는 분석이다. 특히 미국 국방부가 주주로 참여하면, 고려아연은 사실상 미국의 안보 자산으로 분류돼 M&A 자체가 제약을 받는다.

영풍·MBK 연합은 이를 ‘경영권 방어용 백기사’로 평가절하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미국 정부가 프로젝트가 아닌 기업 지분에 투자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번 미국 투자의 결정은 지난해 ‘고려아연 지키기 운동’에 나섰던 울산 지역사회에도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울산에 뿌리를 둔 향토기업으로 남아 지속적인 투자와 일자리를 창출할 것인지, 아니면 사모펀드로 경영권이 넘어가 단기간 내 다시 매각 대상으로 전락할 것인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 대미 제련소 건립 계획에 대해 고려아연 주주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