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숙 시인의 월요시담(詩談)]위선환 ‘동지 무렵’

2025-12-22     차형석 기자

며칠째 눈 내리고 길은 멀고 푹 눈 덮여 있다

새가 걸어서 하늘로 갔다 여러 번 헛딛고 넘어지다가 마침내 눕고 만 듯 빳빳하게 곱은 발가락과 퍼렇게 얼은 아랫몸이 눈 쌓인 하늘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눈 더미를 쓸어 모아 꾹꾹 눌러서 묻고

꾹꾹 손자국 찍힌 하늘의 한쪽이 새 몸뚱이 크기로 묻혀 있는 것 본다

새는 먼저 나를 헤쳐 놓고 갔다 할퀸 발톱자국과 쪼인 부리자국과 파이고 찢긴 살점들이 내 등가죽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눈은 나를 덮었고 아직도 내리고 길은 멀고

이어서 걸어갈 다음 새가 눈 덮인 내 뒷등에 올라 종종대며 눈싸라기들을 쪼고 있다 새의 가녀린 발목이 자주 내 등가죽 안으로 빠진다


고통 속에서도 이어지는 삶의 의지

동지는 밤이 가장 긴 날이니 동지 무렵은 가장 힘들고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시기를 뜻한다. 며칠째 내린 눈이 푹 덮여 있는 길처럼. 이런 날엔 새들도 움직이기 어렵다. 날아오르다, 날아오르다 실패한 새는 그러나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하늘로 갔다. 눈 덮인 먼 길을 걸어서 갔다. 마침내 하늘에 도착했지만 기진한 새는 숨을 놓아버린다.

고난의 서사가 들어 있는 이 시에서 뭉클한 것은 새가 땅이 아닌 하늘에 제 무덤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날기를 열망했으니 새의 영토인 하늘에 묻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꿈꾼 것을 이뤘을 때 곧바로 찾아온 비극은 그러나 ‘하늘’이라는 공간을 통해 생명의 거대한 섭리나 어떤 우주적 순환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다시 눈은 내리고, 다음 새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다음 새가, 그다음 새가. 화자는 새에게 상처를 입었다. 어쩌면 새는 화자의 다른 모습 아닐까? 내부 갈등과 투쟁으로 생긴 좌절과 상처. 그렇다면 새의 죽음은 삶의 한 단계가 끝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상징적인 죽음이겠다. 밤이 가장 긴 동지는 태양의 죽음과 부활, 재생이라는 원형적(原型的) 의미를 갖는다. 계속 걸어갈 다음 새는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의 숭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송은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