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7장 / 정유재란과 이중첩자 요시라 (101)

2025-12-23     차형석 기자

주상은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비망기를 내려 이순신이 역적죄, 반역죄, 원균을 함정에 빠트린 죄를 저질렀으니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백성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하여 비빈들을 거느리고 제후 행세나 하며 살고자 했던 조선왕 이연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후 이순신은 27일간의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죄를 토설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토설할 죄가 없었기에 역적으로 몰려 죽느니 차라리 고문을 받다가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순신의 후임으로는 고니시의 예상대로 원균이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통제사 원균이 넘겨받은 조선 수군의 전력은 군함이 200여 척이었고 군량미 9,914석과 화약 4,000근에 총통(대포)이 300여 문이었다.

한산통제영의 망루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원균의 감회는 남달랐다. 이순신보다 자신이 먼저 출사를 했고 품계도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이순신이 다섯 품계를 건너뛴 벼락 승차를 하는 바람에 그의 아랫사람으로서 몇 년을 보냈다. 그것 때문에 승부욕과 자존심이 강한 원균은 그동안 속앓이를 많이 했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여해를 넘어보리라 절치부심한 결과 오늘에 이르렀다.

자신과 이순신은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육전을 했던 사람이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했는데 자신이라고 못할 것이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수군을 잘 이끌 자신이 있었다.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간 것은 그가 원한 일이 아니었다. 원균이 원한 것은 오로지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였다. 그간의 공이 있으니 조정에서 이순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죽지 않으면 또다시 출사할 길이 열릴 것이고, 그리되면 자신이 더 이상 미안해할 일도 없을 것이다.

원균은 한산도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무료했다. 무기부터 함선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더 이상 신경 쓸 게 없었다. 적어도 이순신의 준비성은 칭찬해 주고 싶었다. 그가 할 일은 그저 통제영에서 기녀들을 끼고 술을 마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이순신이 한양에서 고문을 당하고 있을 무렵, 가토 기요마사에 의해서 1594년에 축성이 완료된 울산의 서생포왜성에서는 가토의 요청에 의해서 4차 강화교섭이 진행되었다. 사명당은 서생포왜성으로 들어가서 가토와 마주앉았다. 이 자리에서 가토는 조선이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아서 재침을 했다는 식으로 침략의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사명당은 고니시와 심유경의 조작이며, 조선은 그런 약속을 한 바 없다고 말했다. 가토는 영토할양에 대한 부분은 빼고 조선의 왕자를 일본에 보내 사죄하고 매년 공문을 보내면 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했으나 사명당은 거절했다. 이로써 왜국과의 강화회담은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