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서 풀리는 돈, 지역에서 안돌고 증발
K-조선이 긴 침묵을 깨고 부활의 뱃고동을 울리고 있다. 수주 잭팟이 터지고 HD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 3사의 매출은 10조원을 돌파했다. 하지만 조선업 메카 울산 동구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화려한 성적표 뒤에 가려진 지역 소멸의 그림자 때문이다. 본보는 3회에 걸쳐 외국인 인력으로 채워진 현장의 명암을 살펴보고, 단순 건조를 넘어 마스가(MASGA) 프로젝트와 북극항로 시대 울산항의 ‘K-MRO’ 전략 등 미래 기술 주권을 지키기 위한 내국인 숙련 인력 양성 방안 등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해 본다.
조선업 슈퍼사이클 속에서도 울산 동구와 거제시 등 조선업 거점 지역은 오히려 쇠퇴하는 호황의 역설이 심화되고 있다. 내국인 숙련공이 떠난 자리를 외국인 인력이 메우면서 소비가 위축됐고, 상권은 불황기보다 더한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내국인 청년 노동력 확보가 미래 대한민국 조선업 전략에 있어 필수적인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핵심 지자체인 동구와 거제시 지자체장과 정치권도 직접 나서 조선업종 고용의 구조 혁신을 촉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22일 국가데이터처와 지역 조선업계 등에 따르면, 지난 10월 울산시의 기타운송장비(조선) 생산 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48.2% 폭증하며 기록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반면 서민 경기의 척도인 대형소매점 판매 지수는 올해 3분기 기준 전년 동기 대비 8.3% 하락하며 부진이 이어졌다.
내국인 숙련공이 떠난 자리를 외국인 인력이 대체하면서 생산과 소비가 따로 노는 이른바 호황의 역설이 나타난 근본 원인은 인구 구조의 급격한 변화에 있다. 지난해 울산시의 청년인구(만 19~39세)는 25만2000명으로 집계됐고, 울산 전체 인구에서 청년이 차지하는 비중은 23.5%로 나타났다. 이는 10년 전인 2015년(33만7000명)과 비교해 4분의 1(25.3%)이나 급감한 수치다. 일자리와 교육 문제로 인한 청년 유출이 지난해에만 1700명을 넘어서는 등 인구 이탈이 계속되는 사이 조선업 현장의 주축이 돼야 할 빈자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웠다. 현재 동구의 외국인 노동자는 8300명을 넘어섰고, 거제시는 1만5000명으로 폭증했다.
문제는 외국인 인력의 소비 패턴과 구매력이다. 일반적으로 동남권 외국인 노동자의 월평균 소득 중 약 23%가 본국으로 송금되고 있고, 국내 카드 사용액 비중은 16%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역 내 ‘선순환 고리’를 끊고 있다는 설명이다. 내국인 소비층이 사라지고 임금의 상당 부분을 고국으로 송금하거나 저축하는 외국인들이 주류 노동 계층이 되면서, 막대한 수주 금액이 지역에 머물지 않고 증발해 버리는 경제 동맥경화가 고착화됐다는 분석이다. 예전보다 한적해진 꽃바위 외국인 특화거리 역시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이는 결국 지역 상권 붕괴로 귀결된다. HD현대중공업이 위치한 동구 전하동 상권의 공실률은 17.4%로 불황 공포가 도시를 덮쳤던 2015년 직후(12.7%)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집합상가 공실률도 20%대에 이른다. 호황기에도 정작 조선업 본산인 동구 골목상권은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던 10년 전보다 더 차갑게 식었다.
조선업 황금기라 불리던 2014년 이전 전하동 공실률이 2.7%로 사실상 빈 가게를 찾기 힘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다. 조선소 매출은 회복됐지만 정작 노동자들이 퇴근 후 지갑을 여는 식당과 상가는 텅 비어버린 셈이다.
현장에서는 고용 구조의 불균형이 이 같은 사태를 키웠다고 본다. 조선업 불황기 구조조정 이후 숙련 인력은 대거 이탈했고, 그 자리는 간접고용과 외국인 인력이 메웠다. 현재 조선 빅3의 하청 비중은 63%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10명 중 6명 이상이 협력업체 직원이라는 의미다.
현재의 고용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K-조선의 화려한 부활은 반쪽짜리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고가 수주 물량의 건조가 집중되는 2026년 인도량 정점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다가오는 가운데 이 인력 병목 현상을 ‘기술 주권 확보’의 기회로 전환하느냐 아니면 ‘산업 경쟁력 상실’의 퇴로로 삼느냐는 정부와 기업의 결단에 달려 있다.
이와 관련, 22일 국회 소통관에서 김태선(울산 동구) 국회의원을 비롯해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 변광용 거제시장은 기자회견을 열고 “동구와 거제는 현재 인구감소, 상권붕괴, 부동산 거래급락, 청년과 숙련공의 이탈이라는 심각한 지역경제 침체를 겪고 있다”며 “조선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구조적 한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어 “과거에 숙련 노동력이 기업의 자산으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숙련 기술인력 자체가 국민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보장하는 국가의 핵심자산”이라며 기업과 정부에 내국인 청년 기술인력 확보를 촉구했다. 오상민기자 sm5@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