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원칙이 흔들린 KDDX
십수 년간 대한민국 해양 안보를 뒷받침해 온 방위산업의 주요 사업인 KDDX(한국형 차기 구축함)가 정치적 논쟁의 한가운데에 섰다. 사업 추진 방식이 기술적 판단과 절차적 원칙만으로 정리되기보다, 대외적·정무적 변수까지 겹치며 ‘경쟁 입찰’로 결론 났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방위사업추진위원회(방추위)의 결정은 단순한 계약 방식 선택을 넘어, 방산 행정의 일관성과 신뢰를 흔들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방산업계에는 오랜 시간 관행처럼 정착해 온 ‘기술의 연속성’ 원칙이 있다. 함정 건조의 품질과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해 기본설계를 수행한 업체가 상세설계와 초도함 건조까지 이어가는 방식이다. 이는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라기보다, 수조원대 국책사업에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무기체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기본설계 과정에서 쌓은 방대한 데이터와 탄탄한 공정 노하우가 더해져 상세설계와 초도함 건조로 이어질 때 예산 낭비를 줄이고 전력화를 적기에 달성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번 KDDX 사업에서는 이 원칙이 지켜지지 못했다. 당초 관행대로라면, 기본설계를 완수한 HD현대중공업이 상세설계로 이어가는 흐름이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수의계약’에 대한 문제 제기 이후 정책 판단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 결과 사업자 선정은 2026년 말로 늦춰졌고, KDDX 사업의 전체 일정은 당초 계획보다 1년6개월 지연돼 글로벌 해양 패권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는 시기 안보 공백이 불가피하게 됐다.
원칙이 반영되지 않은 방추위의 이번 결정으로 울산 시민들 사이에서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조선업 호황과 함께 KDDX 등 방산분야를 발판으로 ‘조선 산업의 재도약’을 꾀해야 할 시기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일감 확보와 직결되는 대형 방산사업이 불투명해진 영향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울산 경제를 위해 민심을 대변해야 할 지역 정치권이 뚜렷한 목소리를 내지 않는 데에 대한 깊은 아쉬움도 공존하는 모양새다.
KDDX 사업은 울산의 한 기업의 문제만이 아니다. KDDX 수주에 실패한다면, 원하청 2000명 이상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울산 주력산업 중 하나인 조선업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 HD현대중공업 노동조합도 이와 관련해 “‘과거의 불법’과 ‘오늘의 노동자 생존권’이 구분 없이 뒤엉킨 채 정책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며 “그 과정에서 특정 기업에만 유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며 꼬집기도 했다.
KDDX는 특정 기업의 이해관계나 정치적 논쟁의 소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국가 방산 경쟁력과 해군력 강화를 위한 전략 사업으로 다뤄져야 한다. ‘경쟁’의 원칙과 ‘연속성’이라는 원칙을 지키면서, 무엇보다도 납득 가능한 기준과 투명한 절차, 지연에 따른 전력화 공백을 줄이는 실행 계획이 담보되어야 한다.
방사청과 관계 기관은 이번 논란을 계기로 판단 근거를 더욱 명확히 설명하고, 사업 지연이 불가피하다면 그 비용과 위험을 최소화할 보완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KDDX가 정치적 논쟁을 벗어나려면, 명분 경쟁이 아니라 절차와 실행에서의 신뢰 회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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