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키다리 아저씨’들, 위기의 한국산업에 등불을 밝히다

2025-12-30     경상일보

백발의 노교수가 작업복 차림의 젊은 엔지니어와 머리를 맞대고 도면 위에서 열띤 토론을 벌인다. 수십 년간 상아탑에서 이론을 연마하고 산업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퇴직 전문가들이 한국의 주력 산업인 조선과 자동차 산업의 위기 극복을 위해 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키다리 아저씨’라 칭한다.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자신들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지식과 경험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고 국가 산업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다는 소박하지만 굳건한 신념 하나로 뭉친 이들이다.

이들 ‘키다리 아저씨’ 모임의 중심에는 ‘티알지(TRG)’와 같은 전문가 그룹이 있다. 수십 년간 대학과 산업 현장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퇴직한 석학들과 기술 장인들로 구성된 이 모임은, 지금 한국 산업이 마주한 복합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를 쥐고 있는 ‘비밀 병기’와도 같다. 정년이라는 사회적 시스템이 그들의 열정과 능력을 더는 묶어둘 수 없었다. 오히려 현장을 떠났기에 한 걸음 더 떨어져 객관적인 시선으로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조선업을 예로 들어보자. 최근 한국 조선업은 중국의 거센 추격과 엔저를 앞세운 일본의 부활 사이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특히 고부가가치 선박의 핵심 기술력 확보와 날로 심각해지는 인력난은 발등의 불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키다리 아저씨’들의 역할이 빛을 발한다. 이들은 현장의 젊은 엔지니어들이 수없이 실패하며 겨우 찾아낼 법한 기술적 해법을 수십 년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관과 통찰력으로 단번에 짚어준다.

자동차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차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의 파도 속에서 기존의 내연기관 중심의 산업 생태계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수많은 중소 부품 협력사들은 당장 내일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이때 ‘키다리 아저씨’들은 단순한 기술 멘토를 넘어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새로운 기술 동향을 알려주고, 기존 설비를 활용해 전환기에 대응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정부나 연구기관의 지원 사업과 연결해 주는 다리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히 개별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산업 현장과 학계의 단절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대학의 연구는 현장의 필요와 동떨어진 채 논문으로만 남고, 산업 현장은 당장의 문제 해결에 급급해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기술 개발에 투자할 여력을 잃어가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들이 끊어내고 있다. 퇴직한 노교수와 연구원들은 대학 연구실의 최신 기술 동향을 현장에 소개하고, 반대로 현장에서 부딪히는 생생한 문제들을 다시 학계의 연구 과제로 연결한다. 이 선순환 구조야말로 한국 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가장 확실한 토대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의 활동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왕년의 전문가’라는 시선과 변화에 익숙지 않은 현장의 경직된 문화에 부딪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진심은 통한다는 믿음으로 묵묵히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젊은 세대와 눈높이를 맞추며 소통하려 노력한다.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기업들도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이제는 먼저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이 소중한 ‘키다리 아저씨’들을 주목해야 할 때다. 이들의 활동이 일부 전문가들의 선의에 기댄 개인적인 활동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정부와 산업계는 이들의 지식과 경험이 체계적으로 활용되고 확산될 수 있는 플랫폼을 마련해야 한다. 퇴직 전문가 데이터뱅크를 구축하고, 이들이 중소기업이나 스타트업의 기술 고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차세대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한 사람의 전문가가 평생에 걸쳐 쌓은 지식과 경험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정년퇴직으로 이 귀중한 자산이 사장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한국 산업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주역들이 이제는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위기의 산업 현장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그들의 깊게 팬 주름과 투박한 손에는 한국 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담겨 있다. 이들의 지혜가 다음 세대로 온전히 흘러들어 갈 때, 한국의 조선과 자동차 산업은 다시 한 번 세계를 향해 힘찬 뱃고동과 엔진 소리를 울릴 수 있을 것이다.

정은 울산대학교 신소재·반도체융합학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