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경계에서 붉은 말의 해를 기다리며

2025-12-30     이다예 기자

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스물두세 살에 교육학 전공서와 레포트 파일을 팔에 끼고 캠퍼스를 오가던 때만 해도, 세월의 흐름이 이렇게 빠를 줄 몰랐다. 묵은해를 잘 정리해야 한다는 말의 뜻도 어렴풋이 짐작만 했다.

12월 끝자락에서 올해를 돌이켜보면 마음 한쪽이 쿡 쑤신다. 잘 버텼다는 안도보다는 제대로 해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먼저 남는다.

누군가의 아빠, 남동생, 삼촌이었을 노동자 7명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11월6일 해체 작업 중이던 높이 60m의 보일러 타워가 한순간에 붕괴되면서 이들의 삶도 함께 무너졌다. 가족들의 꿈과 희망도 차가운 땅속 깊이 파묻혔다. 공사 발주처인 한국동서발전, 시공사인 HJ중공업, 하청업체인 코리아카코는 사고 발생 8일째 현장에 나타나 고개를 숙였지만, ‘늦장 사과’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유가족들은 철저한 사고 원인 규명과 책임자 엄벌을 촉구했다.

이후 합동 감식이 진행됐고, 현장 관계자 다수는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줄줄이 입건됐다. 건설·해체 현장의 안전 시스템 전반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잇따랐다. 사회는 더 이상 이런 사고를 노동자 개인의 부주의로 치부할 수 없다는 데 공감했다.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고, 제대로 된 관리·감독조차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한 달 앞선 10월에는 SK에너지에서 수소배관 폭발로 하청노동자 2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현장은 달랐지만, 구조는 빼닮았다. 위험한 작업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산업 현장은 ‘예기치 못한 사고’라는 말 뒤에 너무 많은 책임을 숨기고 있었다.

학교도 아팠다. 지역 한 중학교 남학생들이 또래 여학생 등의 신체 일부를 불법 촬영해 공유한 사건이 드러나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다. 반복된 민원과 폭언을 일삼은 학부모를 교육감이 직접 고발하는 초유의 교권 침해도 있었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할 공간에서조차 안전과 존엄은 뒷전이 되고 만다.

AI 시대를 말한다. 기술 혁신이 도시 미래를 좌우한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다치고 숨지는 현장에서 혁신은 제대로 된 의미를 갖기 어렵다. 기술이 앞서갈수록 안전 기준은 더 촘촘해져야 한다. 지속가능한 산업과 도시 발전을 위해 안전은 최소한의 조건이다.

2026년은 병오년, ‘붉은 말의 해’다. 질주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압박이 벌써 감돈다. 올해의 상처들이 말해준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고, 도약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서 있는 곳이 무너지지 않는지다. 경계에 서서 또 한 해를 보낸다.

이다예 사회문화부 기자 ties@ks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