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시론]침몰하는 한국 제조업, 지금 우리가 풀어야 할 근본 과제

2026-01-09     경상일보

필자는 울산에서 40여년 동안 도시개발사업을 추진해온 디벨로퍼다. 산업단지와 도시를 계획하고, 그 안에 기업과 사람이 들어와 살아 움직이는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봐 왔다. 최근 들어 가장 자주 듣는 목소리는 제조업 경영자들의 절박한 한숨이다. “이대로는 더 버티기 어렵다” “공장을 해외로 옮길 수밖에 없다”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지금 한국 경제가 마주한 상황은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다. 산업의 뿌리인 제조업이 구조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이 현장에서 분명히 느껴진다. 그래서 필자는 비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근본 문제를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지난 20년간 한국 제조업 임금은 150% 이상 상승했다. 같은 기간 일본은 오히려 임금이 정체되거나 소폭 하락했고, 독일과 대만은 임금 상승을 생산성 향상으로 흡수해왔다. 그러나 한국은 상황이 달랐다. 임금은 빠르게 올랐지만 제조업 생산성 증가율은 최근 1% 내외에 머물러 있다. 현재 한국 제조업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미국과 독일의 약 60% 수준이다. 이는 곧 가격 경쟁력의 약화를 의미한다. 현장에서 만나는 중소·중견 제조업체들은 “사람을 더 써도, 더 주고 써도 결과가 나아지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자동화 투자 여력 부족, 원·하청 단가 구조, 숙련 인력 미스매치가 겹치며 생산성 개선이 쉽지 않은 구조다.

일본 제조업은 높은 인건비에도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생산성 향상을 전제로 한 인력 활용의 유연성이 있다. 일본은 숙련자 중심 공정혁신과 외국인·여성 인력 투입 확대를 병행하며 생산성을 유지한다. 실제로 일본의 한 제조업 협력업체는 직원의 70%가 외국인이고, 여성 근로자 비중도 매우 높다. 중요한 것은 임금 수준이 아니라, 공정 효율과 품질 관리였다. 또한, 독일은 듀얼 교육체계와 중견기업 기술축적 구조를 기반으로 고부가가치 제조 중심을 지키고, 대만은 반도체 집중 전략으로 인력당 부가가치를 극대화했다.

반면 한국은 외국인 근로자를 도입하더라도 내국인과 동일한 임금을 지급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비용 부담만 커졌다. 결국 답은 분명하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도록 생산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자동화 설비, 스마트공장, AI·로봇 기반 공정 혁신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현장의 또 다른 부담은 제도적 불확실성이다. 최근 통과된 노란봉투법 역시 취지 자체는 이해할 수 있으나, 제조업 현장에서는 경영 불확실성을 키운다는 우려가 크다. 원청이 통제하기 어려운 하청 파업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구조는 투자와 생산 계획을 위축시킨다. 제도가 한쪽으로 기울어질수록, 기업은 국내 생산을 리스크로 인식하게 된다. 그 결과는 투자 축소, 공장 이전, 그리고 일자리 감소로 이어진다. 이는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오히려 일자리를 위협하는 역설로 이어질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책임 공방이 아니다. 노동조합, 기업, 정부 모두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생산성과 연동된 합리적인 임금 체계, 공정 혁신을 전제로 한 노사 유연성 회복, 원·하청 구조 개선, 직무 기반 인력 양성 시스템, 그리고 예측 가능한 규제 환경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도시를 설계할 때도 마찬가지다. 토지, 인프라, 산업, 사람이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않으면 도시는 기능하지 않는다. 제조업도 동일하다. 사람과 기술이 다시 연결되지 않으면 경쟁력 회복은 불가능하다.

한국 제조업은 여전히 다시 뛸 잠재력이 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회복은 요원하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권의 책임 있는 결단, 현장을 이해하는 정책, 그리고 노사 간 성숙한 협력이 지금 절실하다.

이정협 서호홀딩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