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군주의 배신 - 7장 / 정유재란과 이중첩자 요시라 (111)

2026-01-12     차형석 기자

이순신은 승전 소식을 조정에 알렸다.

임금은 이순신의 장계에도 불구하고 명량해전을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다. 일부 조정의 신하들이 이순신의 공에 대해서 말했으나 주상은 사실상 패배한 전투인 직산 전투의 승리에 대해서 명군의 공로를 침이 마르도록 치하하고는 말을 닫았다.

주상이 통제사 이순신을 어찌 생각하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주상이 처음부터 이순신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처음에는 이순신을 누구보다도 아꼈다.

그래서 1589년부터 1591년까지 불과 2년 사이에 10등급이나 승차시켰다. 실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그러던 주상이었는데 막상 임진란이 발발하자 자신은 야반도주와 명나라로 망명신청까지 해서 백성들의 신망을 잃은 반면, 이순신은 연전연승을 거두고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으며, 동양 최강의 수군함대를 지휘하고 있어서 언제 그에게 왕위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주상에게 있어서 이순신은 반드시 죽여야 할 인물이었다.

명량해전의 결과는 즉각 왜군 진영에도 전달되었다. 직산과 천안, 충주에서 한양으로 진격하려던 왜군들은 이순신이 거느리는 조선 수군의 부활에 겁을 먹고 황급히 각 전선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라도 각 곳을 점령하고 있던 고니시 군도 순천으로 후퇴하여 왜교성 구축에 전력을 기울였다. 왜교성은 본진 3첩, 내성 3첩, 외성 3첩 등 총 9첩으로 지어진 성으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두 달 만인 정유년 11월에 왜교성 축성을 끝내고 조명연합군과의 장기전을 준비했다.

충주에서 후퇴를 한 가토군은 울산의 태화강변에 왜성을 축조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설계를 하고 1만6000명의 왜군이 동원되었다. 이 성의 이름은 도산성이라 불렀으며, 성은 전형적인 왜성의 축조 기법을 그대로 적용해서 높고 견고하게 지어졌다.

1597년 12월22일(음력)에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 1만5000명과 명의 총병 양호와 마귀가 이끄는 명군 4만명으로 구성된 5만5000명의 조명연합군이 성을 공격함으로써 도산성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에는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온몸이 까만색인 파랑국(포르투갈) 출신의 해귀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 외에도 안남 지방과 인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그보다 더 먼 나라에서 돈을 벌기 위해 명의 군대를 따라온 자들도 있었다.

높고 견고하게 지어진 성 위에서 가토군 1만6000명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항왜장군 김충선은 150명의 항왜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조명연합군을 도왔다. 해귀들은 해전에 능한데도 양호의 명령을 거역하고 태화강에 정박 중이던 왜의 함선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투를 놀이 하듯이 슬렁슬렁 했다. 그런 명나라 군대이기에 전투력은 군세에 비해서 약할 수밖에 없었다.

글 : 지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