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의 울산전란사(18)]남동해안 요충지, 울산진과 서생포만호진성
1.
울산 앞 바다는 외부로부터 적이 침입하기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해안에 위치한 하나의 도시가 몇 개의 강을 지니고 있고 그보다 더 많은 만을 지닌 경우는 드물다. 강과 만(灣)은 바다를 통해서 온 적이 내륙으로 침입하기에 좋은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울산은 적이 침입하기에 최상의 조건을 지닌 것이다. 게다가 울산은 고대 한반도 남동부의 중심지였고, 신라의 천년 수도로서 행정과 경제·문화의 중심지였던 경주와 가까웠다. 내륙으로 오던 해안으로 오던 남쪽이나 남동쪽에서 오는 적은 경주로 가기 위해서는 울산을 거쳐야 했다. 울산에 적의 침입에 대비한 진(鎭)이 설치되고 성(城) 등의 군사시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鎭)은 군사적 지방 행정 구역으로 신라말~조선시대까지 설치됐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순수한 의미의 군사적 거점지역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북방 변경 지역뿐만 아니라 남방의 해안지역에도 진이 많이 설치됐다. 이들 진은 대부분 그 지방에 토착하면서 둔전병이라 할 수 있는 항구적 지방군을 배치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남쪽의 진은 모두 없애고 북쪽의 거란 및 여진과의 경계 지역에 설치했다. 동북 방면에 골암진(지금의 함경남도 안변), 서북 방면 청천강 일대에 통덕진(지금의 평안남도 숙천) 등 많은 진을 설치해 여진족·거란족을 위시한 북방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했다.
1390년(공양왕 2) 도절제사를 장(長)으로 했던 군사 단위로서의 도(道)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7년(태조 6) 5월에 폐지됐다. 그 대신 각 도에 2~4개의 진을 설치해 첨절제사를 두고 부근에 있는 군(郡)의 병마를 통괄하면서 도관찰사의 감독을 받도록 했다. 1398년 10월 다시 도가 설치되면서 도절제사가 고정된 영(營)을 이루고, 각 진의 통제는 도절제사에게 이양됐다. 1421년(세종 3)에 진관체제(鎭管體制)가 확립됐다. 이는 군사 단위로서의 도가 행정구역상의 도와 혼동되는 복잡성을 없애주며, 요새지 혹은 군사기지로서의 거점적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취한 조치였다.
2.
울산진은 조선 초기에 울산지역이 군사 체제로 전환되면서 설치됐다. <태종실록> 권 30, 1415년(태종 15) 9월21일 기사에는 ‘전시귀(田時貴)를 울산진 병마사 지울산군사로 삼았으니, 사천·울산이 진(鎭)으로 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됐다’라고 했고, <태종실록> 권 33, 1417년(태종 17) 1월21일 기사에는 ‘경상좌도 도절제사(慶尙左道都節制使)의 군영(軍營)을 울산군에 옮겼다’라고 했다.
<세종실록지리지> 울산군조에, ‘1397년(태조 6)에 처음으로 울산진을 설치하고 그 병마사가 울주지주사를 겸하게 했다. 1413년(태종 13)에 울산진을 혁파하고 울산지군사(蔚山知郡事)를 뒀다고 해 울산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군사 뒀다’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군 건치연혁조의 기록도 이와 같다. 그런데 <태종실록>에는 1415년(태종 15) 9월에 ‘전시귀를 울산진 병마사 지울산군사로 삼았으니, 사천·울산이 진으로 된 것이 이때부터 시작됐다’라고 했다. 이로 미루어 울산에 진이 설치된 것은 1415년이므로, 1397년에 설치됐다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어긋난다. 한편 1415년 이전에는 <태조실록(太祖實錄)>과 <태종실록>에 ‘울산진’이라는 명칭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위에 언급한 <태종실록>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여겨진다.
울산진은 1417년(태종 17)에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이 경주에서 울산으로 옮겨옴에 따라 혁파됐다. 1426년(세종 8)에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이 창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울산진은 다시 설치됐고, 그 병마첨절제사가 지울산군사를 겸하게 됐다. 1436년(세종 18)에 병마도절제사영을 울산에 다시 설치함에 따라 울산진은 다시 혁파됐다. 1436년(세종 18) 울산진이 혁파된 이후 울산은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후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가 상주하는 경상좌도의 주진(主鎭)이 됐다. 울산진의 설치와 혁파 및 재설치, 그리고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으로의 변천은 조선시대 울산지역이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는 국방의 요지임을 말해 주고 있다.
3.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진(鎭)이 순수한 의미의 군사적 거점지역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북방 변경 지역뿐만 아니라 남방의 해안지역에도 진이 많이 설치됐고, 이 진을 둘러서 성곽이 축조됐다. 이런 진성(鎭城)은 국경 및 해안 지대 등 국방상 중요한 곳에 쌓은 군사적 성격의 성을 가리킨다. 울산에는 서생포만호진성, 염포진성, 개운포진성 등 세 곳의 수군 진성(水軍鎭城)이 있었다. 이 성들의 축조 시기는 울산지역에 서생포만호진성, 염포진성, 개운포진성 등의 수군 진영이 있었다는 <태종실록>과 <경상도지리지>의 기록을 참고할 때 조선 초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울산지역에 있었던 세 개의 진성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서생포만호진성이다. 서생면 지역은 동남해안에 자리한 지리적 성격 때문에 신라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우리나라 해안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서생의 옛 이름은 생서랑(生西良)이다. 생서랑의 지명 유래는 ‘생’이 새나 동쪽의 뜻이 있고, ‘서라(西良)’가 마을을 뜻하므로 ‘경주 동쪽에 있는 고을’이 된다. 생서랑은 경주 동남쪽 해안에 있어 경주의 외곽을 방어하는 군사기지로서의 성격이 강한 곳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 울산조에는 ‘서생포(西生浦)는 군 남쪽 44리 거리에 있다. 모두 수군만호가 있어 수어(守禦)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생포는 회야강이 바다와 합류되는 곳으로 수운(水運)에 유리하며 바다 쪽에서 보면 강 안쪽에 위치해 은폐가 가능한 지역이다. 이러한 전략적인 위치를 감안해 조선 전기부터 수군의 기지로서 병선(兵船)이 정박하고 있었다. 1490년(성종 21) 수군진에도 만일의 변란에 대비하는 조처로 성곽을 축조하게 됨에 따라 서생포만호진(萬戶鎭)에도 석축의 진성이 축조됐다. 서생포에는 태종 때에 만호진, 세종 때에 도만호진(都萬戶鎭)을 뒀으나 곧 만호진으로 변경됐다.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의하면 서생포만호진은 ‘울산읍성을 밖에서 보호하는데, 만호는 3품이며, 병선 20척에 군졸 767명이 상주했다’라고 전한다.
송철호 한국지역문화연구원장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