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바위에 남긴 한 줄의 서사, 영랑성업(永郞成業)-시간을 이긴 기록
말은 흘러가고, 기억은 금세 흐려진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 바위를 택했다.
울산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그렇게 남겨진, 시대의 메모장이다. 선사시대 추상 문양에서 신라의 문자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세계관이 같은 바위 위에 겹쳐 있다. 여기는 유적이기 이전에 시간이고, 수천 년의 역사가 봉인된 타임캡슐이자 인간이 스스로에게 맡겨둔 기억의 저장소다. 암각면의 왼쪽 아랫부분, 몸을 낮춰야 비로소 보이는 자리에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술년유월이일, 영랑성업(戌年六月二日, 永郞成業)’
날짜를 적고, 이름을 밝히고, 결론을 남겼다. 신라 화랑 ‘영랑’이 뜻을 이루었음을 기록한 글이다. 그가 이룬 업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긴 여행의 완수, 학업·수행의 성취, 혹은 인생의 큰 결단이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딱딱한 바위에 새길 만큼 중요한 순간임은 분명하다. 기록으로서 이보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도 드물다.
영랑은 신라 화랑 가운데서도 상징적인 인물로 전해진다. 그는 무예보다 수양과 학업을 중시했고,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길 위에서 배웠다. 강원도의 영랑호를 비롯해 전국 여러 곳에 그의 이름과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한 개인의 명성이라기보다, 당대 화랑들이 걸었던 공부와 수련의 궤적을 보여준다. 영랑의 주유천하는 곧 사유의 확장이었고, 그 여정의 끝에서 그는 자신의 업(業)을 돌아보았을 것이다.
업이란 단순한 공로나 직함이 아니다. 불교적 의미에서 업은 반복된 선택의 총합이며, 한 생애를 관통한 방향이다. ‘영랑성업’ 네 글자는 우쭐한 자만이 아니라 성찰이자 자문에 가깝다. 나는 이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가, 그리고 이만하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그 질문을 던지기에 천전리는 더없이 적절한 장소다. 산자락은 깊고, 계곡은 여러 번 굽이치며, 물길은 수만 년 동안 쉼 없이 이어졌다. 이 앞에 서면 사람은 자연스레 자신을 낮추게 된다. 영랑은 아마 이곳에서 자신의 성취를 과시했다기보다, 자연이라는 가장 오래된 증인 앞에 조용히 보고했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이런 장소를 찾아왔다. 선사인은 동굴 벽에 사냥 장면을 그리며 미래를 기원했고, 고대인은 신전과 비문에 이름을 새겨 신의 기억 속에 남고자 했다. 로마 개선문, 중세 순례자, 조선 선비의 명승 바위까지, 인간은 늘 자신보다 긴 시간 앞에 소망과 다짐을 맡겨왔다.
천전리 암각화가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곳은 단지 오래된 유적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태도가 응축된 장소다. 인근 대곡박물관이 ‘영랑성업’ 네 글자를 전시 개편 과정에서 강조한 것도, 바위의 문장이 오늘을 향해 질문을 던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새해가 시작되고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정초의 다짐이 마음속에서만 맴돌거나 흐지부지됐다면, 대곡박물관을 들러 천전리 암각화 앞에 한번 서 보길 권한다. 바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도록 기억해 준다. 필요한 것은 오직 마음에 다짐을 새기는 일이다.
올 한 해, 각자의 자리에서 ‘성업(成業)’ 하시길 바란다.
김진구 울산대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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